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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4.

Joyfule 2008. 9. 16. 08:24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4.  
    그 손을 보며 나는 그의 손이 내게 대해 얼마나 난폭하며 
    얼마나 엄청낙 깊은 적의를 갖고 있는지, 
    내 생활과 평화를 파괴하려 하고 있는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은시계란 말이야.” 나는 무력하게 떨며 말했다. 
    ”은이면 무슨 소용이야, 낡아빠졌는데. 
    그렇게 좋은 거면 너나 고쳐 가지렴.” 
    경멸에 가득 찬 말투였다. 
    ”하지만, 프란츠.” 
    나는 그가 그대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려봐. 우선 이 시계를 받아줘. 
    정말 은으로 만든 거야. 은이라구, 진짜야. 
    난 가진 게 이것밖엔 아무것도 없단 말야.”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넌 내가 누구에게 가려는지 잘 알겠지. 
    경찰에 가서 말해줘도 돼. 난 순경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몸을 돌려 가버리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일이 그런 식으로 되어선 안 된다. 
    그가 이대로 돌아가버릴 경우 벌어질 온갖 일들을 감당해야 할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프란츠,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겠지. 너 농담이지?” 
    나는 초조한 나머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걸했다. 
    ”물론 농담이야, 하지만 그러려면 넌 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프란츠. 어떻게 하면 되겠니? 
    말을 좀 해봐. 네가 시키는 데로 할게.” 
    그는 눈을 내리깐 채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기분나쁜 웃음을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 
    그는 짐짓 사람좋은 태도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 안 해도 잘 알 거 아냐? 
    나는 2마르크를 벌 수 있는 거야. 
    또 그것을 쉽게 포기할 만큼 부자도 아니고 말야. 
    그쯤은 너도 알겠지. 하지만 넌 부자야, 
    시계도 갖고 있잖아. 내게 2마르크만 주면 돼. 
    그러면 만사 조용하게 해결되는 거야.” 
    난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2마르크라니! 
    그건 내가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10 마르크나 100 마르크, 1000 마르크와 같은 것이었다. 
    내겐 돈이 없었다. 
    어머니께 조그만 저금통을 맡겨놓은 것이 있었고 
    그 속엔 아저씨가 오셔서 주셨을 때나, 아니면 비슷한 다른 기회에 생긴
    10페니 짜리 동전이나 5페니 짜리 동전 몇 개가 들어 있긴 했었다. 
    그것 외엔 한푼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 나이엔 아직 용돈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푼도 가진 게 없어. 돈이라곤 정말 한푼도. 
    그렇지만 다른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난 인디언 책도 가지고 있고 병정들이며 콤파스도 있어. 그걸 갖다 줄께.”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부탁했다.
    크로머는 대담해 보이는 입술을 심술궂게 씰룩거리다가 
    땅바닥에 침을 퉤퉤 뱉았다. 
    ”웃기지 말아! 쓰레기 따위를 내게 주겠다는 거야 뭐야? 
    콤파스라고? 더 이상 날 화나게 만들지 말고 돈을 내놔!”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걸. 
    돈은 구할 수가 없어.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단 말야.” 
    ”정 그렇다면 내일까지 여유를 주지. 내일 2마르크를 가져와. 
    학교를 마친 후에 아래 시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 되는 거야. 만약 돈을 안 가지고 오면 그땐 정말 큰일날 줄 알아.” 
    ”그렇지만 어디서 그런 큰 돈을 구하란 말야? 
    정말 어떻게도 안 되면 어쩌지? 아아---“
    ”돈은 너희 집에 얼마든지 있잖아. 
    그 다음에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럼 내일 학교 마친 후에 보자. 알았지? 
    만약 안 가지고 오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그는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침을 한 번 더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의 생활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대로 어디론지 영영 도망쳐버릴까, 
    아니면 물에라도 빠져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확실한 형체를 갖고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캄캄한 현관 맨 윗층계에 쪼그리고 앉아 
    불행에 내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장작을 가지러 가려고 광주리를 들고 내려오던 리나가 
    그렇게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그녀에게 식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유리문 옆의 옷걸이에 아버지의 모자와 어머니의 양산이 걸려 있엇다. 
    이런 것들을 보자 우리 집의 분위기와 애정이 내게 물밀 듯 밀려왔고, 
    나의 마음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그리운 고향 집의 방 풍경과 향기를 다시 만났을 때와 같은
    감탄과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속해 있는 밝은 세계였으며 
    나는 죄를 가득 짊어진 채 낯선 물결 속에 깊숙이 잠겨 
    모험과 죄악에 몸을 맡기고, 적에게서 협박을 받고, 
    위협과 불안과 치욕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된 자갈이 깔린 고급 현관 바닥, 
    가구 위에 걸린 커다란 그림,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누나의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여느 때보다도 훨씬 더 그립고 부드럽고 소중하게 여겨졌지만, 
    이미 더 이상 그런 것들은 내게 위안이 될 수 없었으며 
    확실한 내 것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엄한 질책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