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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5.

Joyfule 2008. 9. 17. 01:20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5.   
    나는 그 밝고 고요한 세계 속에 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깔개에 지워지지 않는 자욱을 남긴 더러운 발을 하고 있었고 
    우리 집의 세계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자를 가지고 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비밀과 불안을 가졌다 하더라도 
    오늘 내가 가져온 것에 비하면 모두가 장난이며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운명이 나를 쫓아와 두 손을 내게 뻗친 것이며, 
    이것으로부터는 어머니조차 나를 구해낼 수가 없는 것이었고, 
    또 어머니에게는 알려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죄가 도둑질이건 거짓말이건 
    -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어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
    그건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나의 죄는 이도저도 아니라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나는 그를 따라갔던가?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이상으로 크로머에게 그러했던가? 
    무엇 때문에 그 따위 도둑질 이야기를 꾸며댔던가? 
    그런 짓이 진정 영웅적일 수 있는 것처럼 으스대었을까? 
    이미 악마가 내 손을 잡고 있었고 적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동안 나는 더 이상 내 앞에 다가선 공포조차 느끼지 못한 채 
    무엇보다도 내 앞길이 이 순간부터 점차 내리막길이 되어 
    마침내는 암흑으로 이르고 있다는 확신에 몸을 떨었다. 
    지금의 이 잘못으로 인해 또 새로운 잘못을 저질러야 할 것이고, 
    누나들과 다정히 지내는 일이며 
    부모님께 드리는 인사와 입맞춤도 모두 거짓이라는 것, 
    그들에게 숨길 수밖에 없는 운명과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꼈다. 
    아버지의 모자를 보았을 때, 
    잠깐 어떤 믿음과 희망의 빛이 내 마음을 스쳤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말씀드려 아버지의 처분에 따라 벌을 받으면, 
    그리하여 아버지를 내 편이 되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의 참회, 괴롭고 가슴 아픈 시간, 
    용서를 비는 괴로운 탄원이 되고 말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얼마나 감미로운 위안처럼 느껴졌던가. 
    얼마나 아름다운 유혹이었던가.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내가 비밀을 가지고 있고, 
    오직 내 스스로 감당해내어야 할 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일 것이었고, 
    이 순간부터 앞으로는 영원히 좋지 못한 길로 빠져들어 
    악한들과 비밀을 나누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며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는 어리석게도 어른인 체, 영웅인 체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로 일어날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께서내 신발이 젖은 것에 대해 
    꾸중을 하신 것은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꾸중으로 해서 아버지는 더 나쁜 사태를 깨닫지 못하셨고 
    나는 그저 그 비난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남몰래 다른 일에 그것을 연관시켜 버렸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묘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불꽃튀듯 일어났는데 
    그것은 예리하게 날이 선 반항감이었다. 
    이를테면 아버지에 대해 우월감을 느낀 것이었고, 
    젖은 신발에 대한 잔소리는 아주 경멸스럽게 생각되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흡사 사람을 죽인 죄를 지은 판국에 
    빵 한 조각 훔친 것에 대해 심문받는 사람의 심정이었다. 
    그것은 추악하고 적대적인 감정이었지만 
    강하고 진한 매력을 가진 것이었고 
    이런 모든 생각들은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나를 내 비밀과 죄에 결박시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크로머는 경찰에다 나를 밀고했을지도 모르고, 
    비록 집안 사람들은 날르 한갓 철부지로 취급하고 있지만 
    내 머리 위에는 폭풍이 휘몰아쳐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순간이 일련의 체혐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하고 깊이 남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최초의 균열이었고, 
    나의 소년 시절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기둥에 가해진 최초의 톱질이었으니, 
    그 기둥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무너뜨려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감지되지 않는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우리들의 운명에 내면적이고본질적인 선이 그어져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톱질이나 균열의 흔적은 다시 아물고 잊혀지는 것이지만 
    가장 은밀한 마음의 암실 속에서 살아남아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문제를 잘 생각해서 난관을 타개해나갈 
    좋은 방도를 강구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는 있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나는 저녁 나절 내내 변해버린 집안의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벽시계와 책장, 성서와 거울, 
    책꽂이와 벽에 붙은 그림들이 내게서부터 작별을 고했고, 
    나는 내 생활의 온갖 좋은 점들이 모두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채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이젠 내 자신이 스스로 어둡고 낯선 세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한가운데로 
    새로운 흡인력을 가진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음을 느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의 맛을 보았고, 그 맛은 쓰디쓴 것임을 알았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며
    놀라운 변화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기 때문이었다. 
    겨우 잠자리에 들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녁 기도가 최후의 죄를 사하는 불처럼 내 위에 쏟아졌고, 
    식구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 하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노래를 따라 부를 수가 없었다. 
    곡조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담즙이며 독이었다. 
    아버지가 축도를 올리실 때도 나는 함께 기도를올릴 수가 없었고, 
    아버지가 마침내 - 우리와 함께 하옵시기를 -하고 기도를 끝냈을 때는 
    심한 마음의 경련이 나를 가족적인 단란함으로부터 갈라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