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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6

Joyfule 2008. 9. 18. 08:26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6  
차갑고 깊은 피로에 싸여 나는 내 방으로 갔다.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따뜻함과 안도감이 부드럽게 나를 감쌌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고 지나가버린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께서는 여느 때처럼 잘 자라는 밤인사를 해주셨고,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는 아직 방안에 남아 있었으며 
어머니가 든 촛불의 가느다란 빛이 아직도 문 틈으로 새어들고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께서는 다시한번 내게 와주실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는 알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다정하게 입맞춰주시고는 물으시겠지, 
다정하고도 희망이 담긴 목소리로 물으시겠지, 
그럼 나는 울 수 있을 것이고 목구멍에 걸려 있는 돌덩이가 녹아 버릴 것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나는 용서를 빌리라. 
그러면 모든 것은 다 해결되고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 틈으로 비쳐들던 촛불의 빛이 다 사라져버린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낮의 사건을 상기하였고 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똑똑하게 그를 보았다. 
그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에는 야비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이젠 도저히 피할 길 없다는 절망감이 커져왔고 
그 얼굴은 더 크고 흉측하게 변해갔고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내가 군 꿈은 크로머와 오늘의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누나와 내가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주위에는 온통 휴일의 평화와 환히가 있을 뿐이었다. 
밤중에 선뜻 잠이 깨었을 때조차도 그 행복감의 뒷맛을 느낄 수 있었고 
누나들의 흰 여름옷이 햇빛에 반짝이던 모습이 눈에 선했으나 
어느 한순간 나는 천상의 낙원에서 현실로 굴러떨어져 
다시 사악한 적의 눈과 마주쳤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서 이렇게 늦도록 아직 잠자리에 있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고 어디 아프나고 걱정을 하시자 나는 구토를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간의 이득을 보았다. 
조금 아픈 덕분에 아침나절 내내 카밀레 차를 마시면서 
잠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옆 방에서 어머니가 청소하시는 소리, 
또 리나가 복도 바깥에서 고기 장수와 흥정하는 소리를 재미있어 하면서 들었다. 
수업이 없는 오전은 어떤 환상의 세계나 동화 속의 세계 같았고 
햇빛은 찬란하게 방안을 비췄지만 
학교의 초록색 커튼에 가리워진 그런 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조차 흥미가 없었으며 
뭔가 박자가 틀려버린 소리 같았다. 
그래, 만약 내가 지금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렇지만 난 가끔 그랬던 것처럼 단지 약간 아플 뿐이었고, 
이 정도 아픈 것으로는 아무 일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학교를 결석할 수 있는 핑계는 될 수 있지만 
열 한 시에 시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크로머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친절한 간호도 이번 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귀찮고 괴로울 뿐이었다. 
나는 잠든 척하고 누워서 여러가지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모든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어쨌든 나는 열 한싱는 시장엘 가야만 했다. 
그래서 열 시쯤 일어나 머리가 좀 덜 아프다고 했다. 
이럴 경우 다시 자리에 눕던지 학교를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학교 가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돈 한품 없이 크로머에게 갈 수는 없었다. 
내 작은 저금통에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안에 든 돈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돈으로 크로머를 만족시키기는 어림도 없었지만 
한푼도 없이 가는 것보다는 그것이라도 갖고 가서 
크로머를 달래는 것이 낫다는 것을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양말 바람으로 살그머니 어머니의 방에 들어가 
책상 속에 든 내 저금통을 꺼내 왔을 때는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러나 어제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심장의 거친 고동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계단에서 처음으로 저금통을 살펴보고 
그것이 잠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금통을 듣는 일은 쉬웠다. 
가는 양철격자를 부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저금통을 부수었을 때는 무척 슬펐다. 
이것으로서 나는 최초의 도둑질을 한 셈이었다. 
그때까지는 사탕이나 과일을 몰래 꺼내 먹은 정도의 일밖엔 없었다. 
비록 내 저금통이었지만 나는 지금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나는 크로머와 그가 속한 세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는 것과 
자꾸만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악마가 나를 잡아간다 해도 되돌아설 길이 없었다. 
나는 불안에 떨면서 돈을 세어보았다. 
저금통에 들어 있었을 때는 제법 많이 든 것 같더니 
막상 손에 쥐어진 것은 형편없이 적은 돈이었다. 65페니였다. 
나는 현관 옆에다 저금통을 감추어놓고 돈만 꼭 쥐고는 
이전에 현관을 나설 때와는 영 다른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누군가 이층에서 부르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도망쳐 나왔다. 
아직 십 분 정도 시간이 있었으므로 나는 지름길을 일부러 피해 
골목길을 통해 처음보는 것 같은 구름 아래를, 나를 바라보는 집들을 지나 
나를 의심쩍게 바라보는 것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걸어갔다. 
언젠가 학교 친구가 가축시장에서 1달러를 주운 일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신에게 내게도 그런 행운을 주십사고 기도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미 기도할 권리가 없는 놈이었다. 
이제 와서 기도를 아무리 해도 저금통이 이전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멀리서 프란츠 크로머가 나를 알아보고는 
나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천천히 걸어왔다. 
내 곁에 가까이 온 그는 명령하는 듯이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쉬트로 거리로 천천히 걸어내려가 
다리 건너의 작은 골목 끝에 있는 새로 지은 집 앞에서 멈춰섰다. 
거기에는 일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고 
문도 창문도 없이 담들만이 민숭민숭하게 서 있었다. 
크로머는 일단 주위를 한 번 살펴본 후 
문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담 뒤로 돌아가서는 나를 오라고 신호를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가지고 왔어?” 
그는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