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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7

Joyfule 2008. 9. 19. 01:00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1 장 두 개의 세계 - 7  
    나는 주머니에서 움켜쥐고 있던 돈을 꺼내어 그의 손에 떨어뜨렸다. 
    마지막 5페니짜리 동전의 짤랑 하는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벌써 그는 그 돈이 얼마인지를 알아차렸다. 
    ”65페니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는 겁먹은 태도로 대답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이젠 정말 한푼도 없어.” 
    ”꽤 영리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비교적 온화한 어조로 나를 힐책했다. 
    ”명예를 존중하는 남자들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해. 
    난 결코 네게 부당한 걸 요구하자는 게 아냐. 
    그런 니켈 돈 따윈 걷어치워. 너도 누군지 잘 알겠지만 
    그 사람은 값을 깎거나 할 사람은 아니야. 값은 정확하게 셈해 줄 거야.” 
    ”하지만 내겐 이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 
    이건 내가 저금한 돈 전부야.”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냐. 하여튼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넌 내게 아직 1마르크 35페니 빚진 셈인데 언제 갚을래?” 
    ”그래, 크로머. 꼭 갚을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일이든지 모래, 
    곧 더 많이 생길지도 몰라. 
    아버지한테 말씀드릴 수 없다는 건 너도 알겠지.”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냐. 뭐 널 괴롭히려는 건 아냐. 
    다만 오전중에 그 돈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거지. 
    너도 알지, 난 가난해. 그런데 넌 나보다 좋은 옷을 입고 있고 
    아마 점심도 훨씬 맛있는 것을 먹었을 거야. 
    그렇지만 난 아무 말 않겟어. 좋아. 좀더 기다려주지. 
    모레 오후에 휘파람을 불면 그땐 다 가지고 나오는 거야. 
    내 휘파란람 소린 잘 알고 있겠지?” 
    그러고는 전에도 내가 종종 들어본 적이 있는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응, 알고 있어.” 
    나는 대답했다.
    우리들 사이에는 다만 거래가 있었을 뿐 
    우린 서로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는 가버렸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만약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면 나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가끔 그 휘파란 소리를 들었다. 
    어디에 있건, 무슨 일을, 무슨 놀이를, 무슨 생각을 하건 
    그 휘파람 소리는 나를 따라다니며 내게 명령했으며, 
    끝끝내는 그것이 내 운명이 되어버렸다. 
    어느 조용하고 풍요한 가을 오후 내가 늘 아끼는 정원에나와 섰을 때 
    나는 보다 어리고 착하고 자유분방하고 잘 보호받고 있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 즐겨하던 놀이를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때 어디선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예기하고 있던 
    크로머의 휘파란 소리가 들려와서는
    내 마음을 무서울이만큼 산란하게 흐트러놓았다. 
    그 휘파람 소리로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사라지고 
    공상은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또다시 협박자의 뒤를 따라 추악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는 곳에 가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그의 재촉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일이 계속된 것은 비록 수주일쯤이었지만 
    내게는 수년, 아니 영원히 계속되는 것 같았다. 
    가끔은 리나가 요리대 위에 그냥 놓아둔 시장바구니에서 훔친 5페니나 
    1크로센(10페니)을가지고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크로머에게 욕을 먹고 멸시를 당했다. 
    나야말로 그를 속이고 다연히 줘야 할 그의 돈을 주지 않고 
    그에게서 돈을 도둑질해 가서 자기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엇다. 
    평생을 통해 이때처럼 수난을 받은 적도, 
    이보다 더한 절망감, 이 이상의 굴욕감을 느낀 적도 없었다. 
    저금통은 장난감 돈을 넣어서 도로 제자리에 갖다두었고, 
    아무도 그 저금통엔 관심을 갖지도 않았지만 
    언제 발각당할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머니께서 가만히 내게 다가오실 때면 혹시 저금통에 관한 일을 
    묻지나 않으실까 해서 크로머의 휘파란 소리보다 더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한푼도 구하지 못한 채 그 악마에게 나타나는 때가 많아지자 
    그는 다른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그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를 대신해서 그의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고, 
    십 분간 한쪽 다리로 뛰라고 한다든가 
    지나가는 사람의 웃옷에 종이조각을 붙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한 가책으로 나는 며칠 밤을 
    꿈에서도 시달리며 악마에게 쫓겨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결국 나는 병이 났다. 
    구토가 나고 곧잘 오한에 떨었으며, 밤엔 식은땀을 흘리고 열이 올랐다. 
    어머니께서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더욱 내게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 날 내가 벌써 자리에 누었을 때 어머니께서 초콜렛 하나를 갖다 주셨다. 
    옛날 어렸을 적부터 내가 얌전하게 잘 지내면 
    잠이 잘 들도록 이런 것을 상으로 주시곤 했던 것이다. 
    지금 어머니가 여기 서 계시고 내게 초콜렛 한 조각을 내미시는 것이다. 
    나는 단지 머리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어머니께서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아냐, 아냐. 아무것도 먹기 싫어.” 
    나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초콜렛을 내 머리맡에 놓으시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다. 
    이튿날 어머니가 어젯밤의 일에 대해 캐물으시려 하자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한 번은 의사의 진찰을 받기도 했는데 
    그는 아침에 냉수욕을 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우리 집의 평화스러운 생활 속에서 나는 유령처럼 떨고 괴로와하며 지냈으며, 
    그런 상태는 일종의 정신착란이었다. 
    다른 사람과 생활을 함께 할 수도 없었으며 
    한순간도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지낸 적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종종 화를내시며 내게 이유를 물으셨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마음을 닫아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