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4

Joyfule 2008. 9. 23. 03:50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4 
    이 꿈과 관련해서 나는 카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데미안에 대한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내게 나타난 것은 이상스럽게도 또 꿈속에서였다. 
    나는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는 학대받고 압박받는 꿈을 꾸었는데
    내 무릎을 짓밟은 것은 크로머가 아니라 데미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고 신기한 것은
    크로머가 내게 그런 짓을 했을 때는 고통과 혐오감을 느낄 뿐이었는데 
    데미안에게서는 불안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었다. 
    나는 이 꿈을 두 번이나 꾸었는데, 
    그러고나서는 다시 크로머가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꿈속에서 겪은 일과 실제로 겪은 일을 확실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여간 크로머와 나의 괴로운 관계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좀도둑질로 그에게 진 빚을 다 갚았을 때도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나의 도둑질에 대해서도 환히 알고 있었다. 
    크로머는 내가 돈을 갖고 올 때마다 어디서 났는지를 물었는데 
    그로인해 나는 더욱 단단히 그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모든 걸 일러바치겠다고 나를 위협했고 
    나는 두려워 떨었지만 그래도 애초에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몹시 괴로왔지만 모든 일에 대해 후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으며 
    어떤 때는 이런 일이 필연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불길한 운명이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미루어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도 나의 이런 상태에대해 무척 고민하셨을 것이다. 
    낯선 영혼이 나를 덮쳐와 나는 이미 단란한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잃어버린 낙원에대해서처럼 견딜 수 없는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어머니에 의해서는 주로 나쁜 아이로보다는 아픈 아이로 취급을 받았는데 
    실제의 상황은 누나들의 태도에서 잘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무척 너그러웠지만 나를 극도로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은 나의 상태에 대해 한탄하기보다는 동정해야 하지만 
    나를 악이 내재하는 미치광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가족들이 나를 위해 이제까지 드리던 기도와는 다른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기도가 헛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괴로움을 던져버리고 싶은 간절한 희망과 
    진정으로 뉘우치고 싶다는 소망을 격렬히 느끼는 적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아버지 어머니께 똑바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용서를 빌면 친절히 받아들여지고 따뜻히 위로받고 동정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이해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이 모든 일이 진정한 나의 운명인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탈선으로 취급해버리고 말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열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내 처지를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본질을 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감정을 사상으로 변화시킬 줄 알게 된 어른들은 
    단지 아이들에게는 이런 사상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심지어는 아이들은 경험조차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평생에 그때처럼 그렇게 절실한 체험을 하고 
    그때처럼 그렇게 고민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나는 크로머로부터 성의 광장으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물에 젖어 쉴새없이 떨어지는 
    축축한 밤나무 잎들을 발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돈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크로머에게 주려고 
    과자 두 조각을 옆구리에 숨겨 왔었다. 
    나는 어느새 이렇게 어느 모퉁이 같은 데서 
    때로는 퍽 오랫동안 크로머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슨 불가피한 일을 감수해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그것을 감수했다. 
    드디어 크로머가 왔다. 
    오늘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는 내 갈비뼈를 두어 번 쥐어박고는 기분좋은 듯이 낄낄거렸고 
    과자를 빼앗더니 내게 축축한 담배를 권하기까지 했는데 
    물론 나는 그것을 피진 않았다. 
    아무튼 그는 평소와는 달리 유난히 친절하게 굴었다. 
    ”그렇지.” 헤어지려는 차에 그가 말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두는데 다음 번엔 누나를 데리고 나와. 
    나이 많은 누나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미처 대답도 못하고 서 있었다. 
    놀란 모습으로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내 말 못 알아듣겠니? 네 누나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알아듣겠어 크로머.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난 할 수가 없어. 누나도 따라 오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지금 그가 한 말이 계략이고 구실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그런 짓을 했는데 무슨 불가능한 일을 요구해서 
    내 기를 꺾어놓고는 나를 꼼짝도 못하게 얽어 
    다른 요구에 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 또 돈을 몇 푼 더 구해다 바치든지 
    아니면 다른 선물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내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성을 내지 않았다. 
    ”그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잘 생각해보란 말이야. 난 너의 누나랑 사귀고 싶은 거야. 
    언젠가 다음번에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넌 그저 누나를 산책에 데리고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그곳으로 갈 테니까. 내일 내가 다시 휘파람을 불게. 
    그때 다시 이 일을 의논해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