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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7

Joyfule 2008. 9. 26. 03:04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7 
    나는 집으로 왔는데 한 일 년쯤이나 떠돌다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다. 
    나와 크로머 사이에 뭔가 미래랄까, 희망 같은 것이 끼어든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나는 비밀을 안고 몸부림치던 몇 주간 동안 
    얼마나 무섭도록 외로웠던가를 확실히 느꼈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어떤 일을 다시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내가 부모님께 내 죄를 모두 말하고 용서를 비는 일이 
    나의 괴로움을 좀 가볍게 해줄 수는 있지만 
    결코 완전히 구원해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조금 전에 나는 다른 사람에게, 
    다른 낯선 사람에게 고해를 할 뻔했고, 
    그러기만 한다면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예감의 냄새를 강렬하게 느꼈다. 
    나의 불안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아직도 크로머와의 기리고도 괴로운 관계를 각오하고 있었다. 
    만사가 아무 일 엇이 그렇게 평화롭게 진행되어가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리 집 앞에서 날카롭게 들려오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도 나지 않았다. 
    나는 감히 그런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다시 나타나지나 않을까 해서 내심 조바심을 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집으로 오지도 않았고, 불쑥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 놀라운 자유를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유에 대한 불안감은 마침내 어느 
    날 프란츠 크로머를 우연히 만났던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사일러 거리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피해 그대로 되돌아서가버리는 거이었다. 
    그런 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의 적이 내 앞에서 달아나다니! 
    악마가 내게 겁을 먹다니! 
    기쁨과 놀라움이 나를 관통해 지나갔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데미안이 내게 나타났다. 
    그는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고 나는 인사를 했다. 
    ”그래. 잘 있었니, 싱클레어. 
    어떻게 지내는지 만나보고 싶었어.
     크로머도 더 이상 널 괴롭히지 않을걸. 그렇지?” 
    ”네가 그랬니?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난 영문을 모르겠어. 그 녀석은 전혀 나타나질 않아.” 
    ”잘 됐군. 만일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나면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 녀석은 워낙 뻔뻔스런 녀석이니까
    그럼 그 녀석에게 그저 데미안을 기억하라고만 말해.”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거니? 
    그 녀석과 한판 붙어서 실컷 때려 준 거니?” 
    ”아냐. 난 싸움하는 건 과히 좋아하지 않아. 
    난 그저 너하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녀석과 애기했을 뿐이야. 
    널 가만히 놓아두는 게 그 녀석의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을 뿐이야.” 
    ”설마 그 애에게 돈을 준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방법이라면 이미 네가 시험해보았잖아.” 
    나는 그에게 좀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가버렸고 나는 감사와 두려움, 경탄과 불안감, 
    호감과 내면적인 반항심 등이 이상하게 뒤엉킨, 
    옛날부터 그에 대해 느껴왔던 가슴답답함을느끼며 혼자 남아 있었다. 
    나는 머지않아 다시 그를 만나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이 카인의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더 많이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진 않았다. 
    감사의 심정이란 거의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더욱이 아이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내겐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데미안에게 보였던 
    내 자신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그다지 탓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만일 그가 나를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병들고 타락해버렸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해방감을 그 당시로서도 내 소년기의 최대의 체험으로 느끼긴 했지만
    해방을 시켜준 사람에 대해선 기적을 이루어내기가 무섭게 무시해버렸던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배은망덕이란 내게 있어서 결코 이상스런 일은 아니었다. 
    이상스러운 일은 내가 그것에 대해 전혀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미안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건드리게 했던 비밀에 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어떻게 단 하루라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던가. 
    카인에 관해, 크로머에 관해, 독심술에 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호기심을 나는 어떻게 누를 수가 있었을까?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러했다. 
    나는 갑자기 적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밝고 즐거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으며, 
    이미 불안의 발작이나 숨막힐 듯한 
    가슴의 고동소리에 내 자신을 맡기지 않아도 되었다. 
    질곡은 풀렸고, 나는 더 이상 가책에 떠는 죄인이 아니었으며, 
    다시 예전의 학생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나의 본성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전의 균형과 평온 속으로 되돌아오려고 애썼고, 
    무엇보다도 그 끔찍하던 일들과 고통스럽던 일들을 빨리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나의 죄와 깊고 긴 고통의 역사는 흔적이나 인상 한 남김없이 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잊어버리려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고 구원해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오늘날에 와서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저주받은 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크로머에게 당한 몸서리치는 수모에서 상처를 입은 영혼이 
    모든 힘과 노력을 다해 이전의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던 세계로 도망쳐 돌아온 것이었다. 
    다시 내게 문을 열어준 잃었던 낙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로, 누나들에게로, 
    좋은 향기와 아벨에 대한 신의 사랑이 존재하는 곳으로 나는 되돌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