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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3장 도 둑 - 1

Joyfule 2008. 9. 28. 01:05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3장 도 둑 - 1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하에 있던 안전한 내 유년 시절의 생활에 관해,
    또는 어린이를 사랑하고 온화하고 밝은 환경 속에서 
    만족스럽고도 즐겁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생활에 관해서는 
    아름답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온갖 단어들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흥미있는 것은 내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걸어왔던 그 발자취뿐이다. 
    물론 유년 시절의 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갖 아름다운 휴식처와 행복의 섬과 낙원들은 아득한 빛 속에 남겨두고
    나는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직 유년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그때의 경험, 
    나를 내몰고 나를 휘몰아쳐간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런 충동은 언제나 ‘다른 세계’에서 왔으며 불안과 강요와 양심의 가책을 가져다주었고 
    놀랍도록 혁신적이어서 내가 머물고자 애썼던 평화로운 상태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 있는 세계에서는 
    어딘가 숨을 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원시적인 충동이 
    내 속에서도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호기심의 감정이 
    나의 적이며 파괴자로서, 금지된 유혹과 원죄로서 나를 찾아왔다. 
    이러한 것에 대한 호기심과 꿈과 쾌락과 불안이 
    내게 가르쳐준 사춘기의 비밀 같은 것은 어린 시절의 아늑한 평화와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으면서도 아이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중성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의식은 허용된 밝은 세계에 속해 있으면서 
    희미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를 완강히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비밀스런 꿈과 본능과 갈망 속에서 살았으며 
    그런 비밀과 의식적인 생활과의 사이에 갈수록 위태로와지는 다리를 걸쳐놓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내부의 어린이의 세계는 
    이미 모두 허물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나의 부모님들도 
    공개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사춘기의 생명의 충동을 도와주지 않으셨다. 
    단지 현실을 거부하고 갈수록 비현실적이며 허위일 수밖에 없는 
    어린이의 세계에 머물려고 하는 헛된 노력을 도와주실 뿐이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과연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내 부모님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해야 하는 것인데 
    나는 대부분의 소위 명문가의 자삭들처럼 이 문제를 잘못 처리하고 말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라면 특히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살아갈수록 
    자기의 생의 욕구와 주위의 세계가 곳곳에서 대립하게 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전신의 힘을 다해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라는 
    교훈을 배우는 인생의 한 기점이 되는 것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우리를 떠나려 하고 
    고독과 죽음과 같은 차가운 공간이 우리 주위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유년 시절은 점차 허물어져 없어지고 
    숙명적인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러한 경험은 평생을 통해 단 한 번 가능한 것이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경험을 올바로 극복하지 못한 채 
    과거에 집착하고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못되고 가장 살인적인 
    실락원의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시 되돌아가자. 
    내게 있어서 유년 시절에 종말을 고하게 해준 감정과 환상은 
    별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 ‘어두운 세계’와 ‘다른 세계’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 때 프란츠 크로머였었던 것이 지금은 내 자신의 내부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다른 세계’는 외부에서부터 다시금 나에게 지배력을 행사해왔다. 
    크로머와의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난 뒤였다. 
    어린 시절의 그 극적이고 죄악에 가득 찬 추억은 
    아득히 먼 곳으로 물러가 짧은 악몽처럼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프란츠 크로머는 오래 전부터 내 생활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와 마주치게 되는 경우에도 거의 주의를 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내 비극의 또 한 명의 중요한 주인공인 막스 데미안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간혹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슨 영향을 끼치진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점점 가까이 다가와서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절의 데미안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던 바를 전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일 년쯤, 아니 더 오랫동안 나는 한 번도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급적 그를 피했고, 그는 결코 내게 추근거리지 않았다. 
    한 번인가, 우리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나서부타 나는 그의 친절에는 
    어떤 조소나 비꼬는 듯한 비난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간혹 하였는데 
    어쩌면 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경험했던 그 사건과 그 당시에 그가 내게 끼쳤던 영향은 
    내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거의 잊혀진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을 더듬어보면 나는 그가 정말로 
    거기에 있어서 내 눈에 자주띄었음을 잘 알겠다. 
    나는그가 학교에 가는 모습을, 
    혼자서나 혹은 다른 큰 아이들 틈에 끼어서 학교에 가는 것을 본다. 
    그가 진기하게 고독하고 조용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서 
    자기의 특별한 분위기에 싸여 독특한 법칙 아래에 살면서 
    마치 별과 같이 그렇게 걸어가는 것을 본다. 
    누구 하나 그를 사랑하지도,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그의 어머니만은 예외였지만 그는 아이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으로서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은 될 수 있는대로 그를 내버려두었는데, 
    그 역시 좋은 학생이긴 했지만 누구의 마음에도 들려고 애쓰진 않았다. 
    우리는 종종 그가 선생님에게 했다는 심한 도전이나 
    풍자로 생각되는 어떤 말이나 비평이나 항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