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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8

Joyfule 2008. 9. 27. 01:49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2 장 카인  - 8
    데미안과 짧은 이야기를 나눈 그 다음날, 
    되찾은 자유에 대해 충분히 확신이 서고 
    그것이 다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되었을 때 
    나는 그렇게도 자주 열렬히 원했던 일을 했다
    나는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께 열쇠가 부서지고 장난감 돈이 들어 있던 저금통을 갖다 보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어리석은 거짓말 때문에 
    못된 아이에게 시달림을 받아왔는지를 고백했다.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시지는 못했지만, 
    저금통과 달라진 내 눈빛을 보고 달라진 내 목소리를 듣고는 
    내가 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어머니의 아들로 되돌아왔음을 느끼셨다. 
    나는 극도로 흥분되어 내가 다시 돌아온 것에 
    축제를 벌이고 방탕아의 귀향식을 거행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아버지께 데리고 가셔서는
    다시 이야기가 되풀이되고 질문을 하시고 놀라시더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오랫동안의 난처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 
    모든 건 멋있었고 이야기 같았으며,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려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조화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평화를 되찾고, 다시 아버지 어머니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는 건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모범적인 아들이 되었고, 옛날보다 누나들과도 더 잘 어울렷으며, 
    기도를 드릴 때에는 구원을 얻은 자와 회개한 자의 감사에 넘친 심정으로,
     내가 좋아하던 옛날의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일이며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전적으로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데미안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여기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데미안에게도 나는 참회를 했어야만 했다. 
    그 참회는 그럴 듯하거나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테지만 
    나로서는 참회를 했어야만 더 기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온 힘을 다해 옛날의 낙원에 집착했고 
    귀향을 해왔고 신선한 자비로써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크로머와는 달랐지만 어떤 미로는 그 또한 유혹자였으며 
    내가 영원히 다시 알고자 하지 않았던 
    다른 나쁜 세계와 연관을 맺게 했던 것이었다. 
    나 자신은 이제 겨우 아벨로 돌아와 있는 상태에서 
    또 다시 아벨을 버리고 카인을 찬미하는 것을 도울 수는 없었으며 
    스스로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정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인 사정은 달리 존재했었다. 
    나는 크로머의 손에서 해방되었지만 
    내 스스로의 힘으로 그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의 좁은 길을 곧바로 걸어가려고 애썼지만 내겐 너무 위험했다. 
    다행히 어떤 친절한 손이 나를 붙들어 위험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더 이상 한눈을 파는 일 없이, 
    어머니의 품, 경건하고 따스했던 
    어린 시절의 안락한 보호 속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더 순종했으며 더 어린애처럼 굴었다. 
    크로머에 순종했던 것을 나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야만 했었는데 
    나는 이미 혼자 걸어가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맹목적이다 싶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켜주시는 
    옛날의 익숙한 ‘밝은 세계’에 속하기를 갈망했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세계가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데미안에게 의지하고 
    그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 당시의 나에게는 지극히 정당한, 
    그의 이단적인 사상에 대한 불신임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미안은 내게 부모님들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자극과 경고로써 조롱과 풍자로써 
    나를 보다 적극적인 인간이 되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반 년쯤 후의 어느 날 
    산책길에서 아버지께 많은 사람들이 
    카인보다 아벨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여쭤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대단히 놀라시면서 
    그러한 견해는 전혀 새로운 점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 견해는 원시기독교 시대 대부터 시작되어 여러 종파에서 전도되어왔는데 
    그 종파들 가운데의 하나는 ‘카인교파’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적인 사상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악마의 기도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카인이 옳고 아벨이 부정하다고 믿는다면 
    신을잘못 생각한 것이 되고, 따라서 
    성서의 신은 올바른 유일신이 아니라 그릇된 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카인교파들은 그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교도들은 먼 옛날에 사라졌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학교 친구가 그런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단연코 배척해야 한다고 엄숙히 경고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