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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2.

Joyfule 2008. 10. 6. 01:53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2.
    우리는 곧 조그만 교외의 주막집에 마주앉아 
    다소 미심쩍은 맛의 포도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언지 새로운 맛이 느껴지긴 했다. 
    나는 술을 마셔본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곧 취하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나의 내부의 창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고 세계가 그 속에 비쳐들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참으로 무섭게도 오랫동안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지껄였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까지 멋지게 해치웠다! 
    베크는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마침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내 어깨를 치며 아주 근사한 녀석, 
    재주있는 녀석이라 불렀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켰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인정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나이많은 선배에게서 
    제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날뛰었다. 
    나는 독창력있는 녀석이라고 한 그의 말은 
    내 마음속에 감미롭고도 독한 포도주처럼 스며들었다. 
    세계는 새로운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고 
    사상은 수백의 세찬 샘처럼 솟구쳤으며 영혼과 불이 나의 내부에서 불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멋지게 의기투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그리스인과 이교도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베크는 나로 하여금 정사에 대한 고백을 들으려 애를 썼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만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혼자서만 느끼고, 만들어내고, 
    공상해온 것은 나의 내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술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다. 
    여자에 대해서라면 베크 자신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나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듣고 있자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온 일들이 
    사실에 있어서는 아주 평범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알폰스 베크는 열 여덟살쯤 되었을 뿐이지만 벌써 경험이 많았다. 
    모든 경험 가운데서도 베크는 특히 처녀들이란
    아름다운 일이나 은근한 것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경험을 하였는데 
    물론 그것은 좋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었다. 
    부인네들에게서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는데 
    그네들이 훨씬 그 점에 대해 영리하다는 것이었다. 
    가령 문방구 주인인 야크겔트 씨의 부인 같은 여자와는 이야기가 잘 통하고 
    그 가게의 카운터 뒤에서 이제까지 있어온 일들을 
    어떤 책에도 적힐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멍청히 앉아 있었다. 
    물론 내가 야크켈트 부인을 사랑하게 될 리는 없을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이먹은 사람들에게는 나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샘이 흐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야기에는 약간의 거짓말도 섞여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했고 
    그가 말한 것은 내 생각 속에서의 사랑의 맛보다는 
    보잘것없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었고 생활이며 모험이었던 것이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모두 실제로 경험하고 
    그 경험을 아주 일상적인 일처럼 취급하는 사람이 내 곁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다소 뜸해지고 활기를 잃었다. 
    나는 더 이상 천재적인 어린 녀석이 아니었으며 
    단지 어른의 말에 혹해 귀기울이고 있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수개월 동안의 나의 비참한 생활에 비한다면 천국에서의 일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주막에 앉아 있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 내용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서 미흡하나마 정신적인 어떤 것을 맛보았고 혁명의 징후를 감지했다. 
    나는 그날 밤의 일을 뚜렷이 기억한다. 
    우리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가스등의 곁을 지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귀가를 재촉했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취해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았고 사실 몹시 괴로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외에 무엇인가 매력과 감미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반란과 방종이었고 생명력과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보고 새파란 풋나기 녀석이라고 
    투덜거리며 욕하긴 했지만 나를 끝까지 책임졌다. 
    그는 나를 반즘 떠매다시피 하여 기숙사까지 데리고 왔고 
    어찌어찌해서 열려져 있는 창문으로 
    무사히 들키지 않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