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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1.

Joyfule 2008. 10. 5. 02:03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1.   
    방학이 끝나자 나는 내 친구를 다시 만나보지도 못하고 성○○시로 출발했다. 
    부모님께서는 두 분 다 나를 따라오셔서는 온갖 일에 세심히 염려 해 주시면서 
    김나지움의 선생님이 경영하는 소년 기숙사에 내 거처를 정해주셨다. 
    그렇지만 부모님들께서 나를 어떤 곳에, 
    어떤 아이들 사이에 넣어주셨는지를 아신다면 아마 기절할 만큼 놀라셨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가 착한 아들이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천성이 다른 길로 뻗어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아버지의 세계와 아버지의 정신적인 영향력 아래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내 마지막 노력은 오래 계속되었고 
    한때는 거의 성공할 것 같기도 했었으나 결국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견신례를 받은 이후 방학 동안 최초로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과 고독감은
    (나는 이 공허감과 희박한 공기를 후일 또 얼마나 진하게 맛보게 되었는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일은 이상스러울이만큼 쉬웠고 
    전혀 슬프지 않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누나들은 끝없이 울었지만 나는 전혀 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한 자신에 대해 무척 놀랐다. 
    나는 꽤나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고 근본적으로는 제법 선량한 아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나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아주 냉담한 태도를 취하며 
    온종일 나의 내부에 귀기울였었는데 결국은 가장 내면적인 곳에서 흐르고 있는 
    금지된 어두운 냇물 소리를 듣는 데 온 정신을 빼아시고야 마는 지경이었다. 
    지난 반 년 동안 나는 급격히 자라나 후리후리하고 야윈 모습으로 
    불완전하나마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년다운 귀염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져 
    내 자신조차도 이런 모습으로서야 남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더구나 나 자신조차도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자주 막스 데미안을 깊이 동경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미워하기도 하였으며 
    내 자신이 짐어진 추악한 병과 같은 생활의 빈곤함에 대해 
    은연중 그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서 나는 귀여움을 받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존중을 받지도 못했다. 
    처음엔 놀림을 받았고 다음엔 경원당했으며 
    음울한 녀석, 불쾌한 별난 녀석으로 취급되었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한층 더 과장하기까지 했는데 
    표면적으로는 가장 사나이답게 세상을 멸시한다는 듯이 
    고독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남몰래 비애와 절망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쌓아두었던 지식을 조금씩 파먹었는데 
    지금의 학급이 이전의 학급에 비해 다소 뒤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이가 같은 또래를 어린애라고 얕보는 습관마저 생겼다.
    일 년쯤,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아무런 새로운 변화는 없었다. 
    나는 기꺼이 집을 다시 떠나왔다. 
    11월 초순의 일이었다. 
    나는 어떤 날씨에도 생각에빠져 정신없이 산책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데 
    그렇게 걸으면서 나는 일종의 즐거움을, 
    우울과 염세와 자기 모멸감에 가득 찬 뒤틀린 기쁨을 맛보곤 하였다. 
    어느 날 나는 축축히 안개가 내리고 있는 해질녘에 교외에 있는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원의 넓은 가로수 길은 텅 빈 채 나를 맞아들였다. 
    길에는 낙엽이 겹겹이 깔려 있었고 
    나는 어두운 쾌감을 느끼면서 발로 그 낙엽을 헤적거렸다. 
    축축하면서도 쓴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았고 
    먼 곳의 나무들은 안개 속에서 도깨비처럼 그림자를 지으며 서 있었다. 
    긴 가로수 길의 끝에서 나는 망설이는 심정으로 멈춰서서 
    검은 나뭇잎을 쳐다보며 그것들이 바스라져 사라져가는 
    축축한 냄새를 탐욕적으로 들어마셨다. 
    나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그 냄새에 응답하며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 인생의 무의미함이여! 
    누군가 옆길에서 바람에 외투의 높은 깃을 펄럭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내가 그 자리를 떠나려 하자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이봐, 싱클레어.” 
    다가운 사람은 우리 기숙사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알폰스 베크였다. 
    나는 그를 만나는 것을 좋아했는데 내게도 다른 애들에게 하는 것처럼 
    언제나 비꼬듯이 이야기하며 어른인 척하는 태도를 제외하면 
    별달리 그에 대해 반감을 갖진 않았었다. 
    그는 곰처럼 힘이 세고 기숙사의 사감을 꼼짝도 못하게 하고 있다는 
    김나지움 학생들간의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넌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니?” 
    그는 어른들이 때로 우리 또래의 학생들을 어른처럼 대해줄 때와 
    같은 어조로 상냥하게 말을 했다. 
    “어디, 내기를 해볼까. 너 시를 짓고 있지?”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끊었다. 
    그는 낄낄거리고 웃으며 내게로 다가와서 
    전혀 익숙치 않은 태도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계할 건 없어, 싱클레어.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니? 
    이렇게 안개가 내리는 가을 저녁에 사색에 잠겨 거닐 때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법이거든.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시를 쓰지. 그런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물론 사라져가는 자연에 대해서나 아니면 
    그것과 비유되는 사라져간 청춘에 대해서 . 
    하인리히 하이네를 봐.” 
    ”난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 말에 항의했다. 
    ”그래, 좋도록 생각하렴! 
    그런데 이런 날씨에는 한잔의 포도주나 아니면 비슷한 것이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때 잠깐 나를 따라올래? 
    나도 마침 혼자니까. ---생각이 없니? 
    네가 모범생이 되겠다고 한다면 굳이 권하진 않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