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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5.

Joyfule 2008. 10. 10. 00:56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5.
    그러나 아버지의 음성에는 즐거운 기색이 없었고 
    얼굴은 늙고 피곤해 보였으며 한결 조그맣게 오그라들어 보였다. 
    어머니는 슬픈 표정을 하고 계셨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괴롭고 거북하게 느껴졌다. 
    선물과 축복, 복음서와 불이 밝혀진 트리조차 그러했다. 
    꿀을 바른 과자는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향긋한 추억의 짙은 구름을 만들어내었다. 
    전나무의 향기는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이 밤과 축제일이 한시빨리 끝나기를 초조히 기대했다. 
    온 겨우리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방학이 되기 직전에 나는 교사회로부터 심한 경고를 받았고 
    제명시키겠다는 위협을 받았었다. 
    더 이상 이런 생활을 지속시켜갈 수는 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나는 데미안에게 특별한 원망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를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성○○시로 간 초기에 나는 그에게 두 차례의 편지를 보냈었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방학 동안에 그를 방문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 알폰스 베크와 만났던 그 교외의 공원에서 봄이 시작될 무렵, 
    가시울타리가 푸릇푸릇해지기 시작할 그때 
    나는 우연히 한 소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불쾌한 생각과 걱정에 휩싸여 혼자 터덜거리고 있는 차이었다. 
    건강은 나빠지고 돈은 끊임없이 모자랐고 
    친구들에게 빌어 쓴 액수는 점점 불어나서 집에서 돈을 타내기 위해서는 
    그럴 듯한 지출 명목을 생각해 내야 했다. 
    여러 군데의 가게에는 담배나 기타 다른 외상 물건값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걱정거리들이 아주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이곳의 생활이 끝장이 나서 내가 물속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감화원에 끌려갈 지경이 되면 
    이런 일쯤이야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는 노상 그런 저런 종류의 아름답지 못한 일에 
    직접적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나를 몹시 억압하고 있었다.
    그런 일상의 와중에서 나는 봄날의 공원에서 
    내 마음을끄는 한 젊은 처녀를 만났던 것이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우아한 차림을 한 그 여자는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는데 
    나는 그런 느낌의 여자를 좋아했으므로 당장에 그 여자에 대한 공상을 시작했다. 
    나보다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성숙하고 우아하고 윤곽이 잘 정리되어 보였으며, 
    벌써 완전한 귀부인의 자태를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내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교만함과 처녀다움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마음에 둔 여자에게 접근하는 일에 성공해보지 못했으며 
    이 여자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의 인상은 과거의 어느 소녀들보다 더 깊었고 
    그 짝사랑은 내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돌연 다시금 내 앞에는 고귀하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영상이 나타났다
    나의 내부에 있어서는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이나 충동도 
    경건함과 숭배하고자 하는 소원만큼 깊고 열렬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단테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영국판의 그림에서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고 
    그 그림의 복제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 초기파의 화풍으로 그려진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갸름하고 긴 얼굴에 영혼이 깃든 손과 표정, 
    길쭉길쭉한 사지에 날씬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내 마음을 끈 처녀도 모습에 있어서는 날씬한 자태와 
    소녀다운 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얼굴 표정에서 
    다소 정신화된 점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그림의 여자와 비슷하였지만 전적으로 유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말을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시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내 앞에 자기의 모습을 세워놓음으로써 성스러운 전당을 열어주었고 
    나로 하여금 사원의 기도자가 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주막집 순례와 밤의 싸움질로부터 소원해졌다. 
    나는 다시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독서와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이러한 돌발적인 전향으로 나는 숱한 조소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사랑할 대상, 사모할 대상을 가지게 된 것이었으며 
    이상이 되살아났고 예감과 신비롭게 아롱진 어스름이 생활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를 여타의 조소에 무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비록 숭배하는 영상의 하인이나 노예로서일망정 
    내 자신 속에 깃들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감동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금 나는 무너져버린 생활의 폐허 속에서
     ‘밝은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시작했으며 
    마음속에서 어둠과 악을 몰아내고 완전히 밝은 세계 속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들 앞에 무릎을 꿇는 심정이 되었다. 
    지금 내가 영위하고자 하는 ‘밝은 세계’는 어느 정도 나의 창조물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머니나 책임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것과는 달랐으며 
    거기에는 책임감과 일종의 자기 억제력이 요구되었으며 
    새롭게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자기 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