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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6.

Joyfule 2008. 10. 11. 01:24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4 장 베아트리체 6.  
    나를 끊임없이 괴롭혀 와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애썼던 
    성적인 욕구도 이 성스러운 불 속에서 정신과 예배로 정화되어갔다. 
    더 이상 음침하고도 흉측한 것들이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신음하면서 지낸 밤들, 음란한 생각 앞에서의 심장의 고동, 
    금지당한 문 앞에서 엿듣던 소리, 
    온갖 음탕한 짓거리들도 다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이 모든 것들 대신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모신 제단을 마련하였고 
    그 여자에게, 또한 정신과 여러 신들에게 나를 바쳤다. 
    음침한 세계 속에서 찾아온 삶의 대가를 밝은 세계의 제물로 바쳤다. 
    나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라 청순함이었으며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이 베아트리체에 대한 숭배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어제까지는 조숙한 풍자꾼이었던 나는 성자가 되려는 
    희망을 품은 사원의 하인이 되었다.
    나는 내 몸에 젖어 있던 나쁜 생활 습관을 청산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먹고 마시는 일에서나 
    이야기나 옷차림까지도 여기에 부합되도록 신경을 썼다. 
    나는 아침마다 냉수 마찰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대단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나는 진실되고 품위있는 행동을 했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천천히 위엄있게 걸으려고 애썼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으나
    내 마음은 그만큼 신에의 봉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 가운데서 나는 한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국판 베아트리체의 초상이 
    그녀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던 점이 일의 발단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내 나름으로 그려보려고 애썼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갖고 나는 내 방에
    ---최근에 나는 독방을 쓰게 되었다---
    깨끗한 종이와 그림물감과 붓을 챙겨두었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준비했다. 
    새로 사온 조그만 튜브 속에 든 색고운 템페라 물감이 나를 매혹시켰다. 
    지금에 와서도 처음으로 물감을 뽀얀 접시 위에 짰을 때의 
    그 빛깔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기억할 수가 있다. 
    그것은 불타는 듯한 크롬 옥시트 초록색이었다. 
    나는 신중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것을그려보려고 했다. 
    장식 무늬, 꽃, 작은 환상적인 풍경화, 교회 앞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실버들이 서 있는 로마의 다리 같은 것을 그렸다.
     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완전히 넋을 잃기도 하고 
    그림물감 상자를 처음 가지는 아이처럼 행보해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드디어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장은 완전한 실패작으로 나는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때때로 거리에서 만나던 그 소녀의 얼굴을 
    마음속에서 생각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잘 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소녀를 그리는 것은 포기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림물감이나 붓이 이끌어가는 대로 얼굴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얼굴은 꿈에서 본 모습이었는데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시도를 계속해나갔다. 
    한 장 한 장 새로운 얼굴이 완성되어갈 때마다 그 모습은 한결 선명해졌고 
    결코 실제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 소녀의 타입에 가까워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꿈꾸는 것처럼 
    붓으로 줄을 긋고 화면을 메워나가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떤 모델을 생각하며 그린 것도 아니었지만 장난삼아 그려가는 동안에, 
    무의식중에 형상화되어간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이제까지 그린 어떤 얼굴보다 
    한층 더 강력하게 내게 말을 건네오는 한 얼굴을 완성시켰다. 
    그 얼굴은 이미 이전의 어느 소녀의 모습은 아니었는데 
    오래 전부터 내가 그린 그림은 더 이상 그 여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녀의 얼굴처럼 보였고
    머리칼도 그녀의 것과 같은 옅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이마는 단단하고 야무지게 보였고 입술은 붉게 타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딱딱하고 가면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인상적이고도 신비스러운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내가 완성시킨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어떤 야릇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그것은 신의 초상의 일종이거나 신성한 가면처럼 보였고 
    절반은 남성적이고 절반은 여성적이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의지가 엿보였으며 남 모르는 생명에 충만해 있으면서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얼굴은 나에게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는 것 같았고 
    나 자신 속에 존재하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어느 누구와 닮아 있었긴 했지만 
    누구와 닮았는지를 알 순 없었다.
    이 얼굴은 얼마 동안 나의 모든 생각 속에 
    살아 움직이고 나와 함께 생활을 나누었다. 
    나는 그것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혹시라도 누가 보고 나를 놀려대는 것은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자되기가 무섭게 그 그림을 꺼내어 그것과 사귀었다. 
    저녁엔 그 그림을 침대 맞은편 벽지 위에 핀으로 꽂아놓고는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으며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마자 그 그림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시절, 나는 어린 아이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야 꿈들이, 아주 새로운 종류의 영상이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