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6 장 야곱의 싸움 - 4

Joyfule 2008. 10. 25. 00:54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6 장 야곱의 싸움 - 4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밤이면 나는 내 자신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그런 꿈을 꾸곤 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야!” 
    나는 피스토리우스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를 생각해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무작정 전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면, 
    또 내 스스로가 그것을 준수해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다음이 아니면 
    함부로 충고를 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충고의 말조차 해줄 수 없다는 것에 깊은 굴욕감을 느꼈다. 
    ”나는 온갖 실험을 다 해보았어!” 크나우어는 한탄하며 말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냉수욕도 해보고, 
    눈으로 몸을 비비기도 하고, 체조와 달리기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매일 밤마다 나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 그런 꿈에서 잠을 깨는 거야. 
    더욱 두려운 일은 그런 꿈으로 인해 내가 정신적으로 배웠던 
    모든 것을 차츰차츰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 
    나는 더 이상은 마음을 집중시키거나 스스로 잠들 수도 없게 되어 
    어떤 때는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기도 해. 
    나는 더 이상 이 상태를 지탱하지 못하겠어. 
    내가 만약 이 싸움을 계속해나가지 못하거나 항복해버려 자기를 더럽히게 된다면 
    그때는 애당초 한 번도 싸움을 하지 않았던 사람드로다 
    더 나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 거야. 넌 그걸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거기에대해서는 한 마디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의 깊은 고통과 절망이 나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단지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만 깊이 인식될 뿐이었다. 
    ”그럼 너는 내게 해줄 말이 한 마디도 없다는 거니?” 
    마침내 지친 그가 슬픈 듯이 말했다. 
    ”전혀 아무것도 없어? 
    한 가지쯤은 있을 수도 있을 텐데! 대체 넌 어떻게 하고 있니?” 
    ”난 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어, 크나우어. 
    사람이란 이런 경우엔 서로 도울 수가 없어. 
    나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거든. 
    자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어. 
    그리고는 네 본질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대로 행하면 되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만일 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찾을 수 없다면 
    넌 어떤 신령도 발견해낼 수 없으리라는 건 확실해.” 
    그는 깊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갑자기 증오에 불타오르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난폭하게 외쳤다.
     “쳇, 넌 정말 근사한 성인군자시군! 
    너도역시 악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 
    너는 현자인 척하면서 뒤에서는 남몰래 나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쓰레기에 매달려 있는 거야! 
    너도 역시 돼지야. 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돼지란 말이야. 
    우리들은 모두 돼지인 거야!”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내버려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두서너 발자국쯤 나를 따라오더니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뛰어 가버렸다. 
    나는 동정과 혐오가 뒤범벅이 된 심정으로 심한 구토증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조그만 내 방에서 두서너 장의 그림을 주위에 세워놓고 
    간절한 내심의 동경으로 내 자신의 꿈에 몸을 맡기기까지 
    이러한 심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곧 나의 꿈이, 집의 문과 문장, 
    어머니와 낯선 여인에 관한 나의 꿈이 다시 나타났다. 
    나는 그 여인의 표정을 너무나 생생히 느끼고는 
    당자에 그 여인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십 오 분씩 꿈속에 잠겨서 무의식중에 시간을 보낸 후 
    그림을 그려나가 마침내 며칠 후 그 그림이 완성되자 
    나는 저녁 무렵 그것을 내 방의 벽에다 붙이고 
    탁상용 램프를 그 앞에 옮겨다 놓고는 생사를 결판낼 때까지 
    싸워야 할 유령에게 대적하는 심정으로 그 그림 앞에 다가섰다. 
    그 얼굴은 옛날의 초상과도 닮았고 나의 친구 데미안과도 닮았으며 
    몇몇 표정은 내 자신과도 닮아 있었다. 
    한쪽 눈은 표시가 날만큼 다른 눈보다 위쪽에 붙어 있었고 
    눈매는 숙명에 충만된 채 내 머리 너머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 그림과 마주서자 내면적인 긴장으로 가슴속까지 써늘해져 왔다. 
    나는 그 그림을 향해 말을 걸었고, 비난했고, 
    어머니라 불렀고, 애인이라보 불렀으며 
    매춘부이며 천한 여자라고 불렀고 또 아프락사스라고도 불렀다. 
    그러는 동안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혹은 데미안의 말이었던가? 언뜻 생각났다. 
    언제한 말인지는 기억해낼 수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을 다시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야곱과 신의 천사 사이의 싸움에 관한 말로서
     “그대 나를 축복치 않는다면 내 그대를 놓아주지 않으리로다”라는 것이었다. 
    그림 속의 얼굴은 램프의 불빛을 받으며 내가 부를 적마다 변화했다. 
    그것은 환하게 빛나기도 하고, 검고 어둡게 변하기도 했다. 
    생기없는 눈으로 창백한 눈꺼풀을 감았다가는 다시 뜨고, 
    그러다가는 타는 듯한 광채로 눈을 빛내기도 했다. 
    그 얼굴은 여자였고 동시에 남자였으며 소녀였고 조그만 아이였고 짐승이었다. 
    몽롱하게 반점처럼 보이다가는 다시 크고 분명하게 되기도 했다. 
    마지막에 나는 강력한 내부의 부름에 따라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 그림이 나의 내부에서 한결 더 
    강하고 힘찬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자신의 내부에 너무나도 깊이 들어 있었으므로 
    마치 그것이 온통 내 자신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아서 
    그것을 나에게서 분리해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