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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6 장 야곱의 싸움 5

Joyfule 2008. 10. 26. 00:48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 6 장 야곱의 싸움 - 5 
    그러자 봄의 폭풍과도 같이 어둡고 무겁게 들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새로운 체험의 감동에 몸이 떨려왔다. 
    별들이 내 앞에서 명멸해갔고 잊어버린 유년 시절의, 아니, 
    존재 이전의 시기와 생성의 초기적 단계에까지 이르는 추억이 
    나의 곁을 밀치고 또 밀치면서 스쳐갔다. 
    내 생활의 모든 것은, 
    가장 은밀한 비밀에 이르기까지도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이던 추억은, 
    어제와 오늘로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앞선 미래를 반영하고 
    오늘로부터 나를 분리시켜 더 새로운 생활의 형식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그 형식의 형상은 굉장히 맑고 눈 부실 정도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불을 켜고 중요한 걸 생각해내야 한다고 느꼈지만 
    몇 시간 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그림을 찾았지만 
    그것은 이미 벽에도 걸려 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도 없었다.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내가 태워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그것은 내 손바닥 위에서 태워 그 재를 먹어버린 것은 혹시 꿈이었을까? 
    크고 쑤시는 듯한 불안이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모자를 쓰고 집과 골목 사이를 
    무엇엔가에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걸어갔다. 
    폭풍에 휘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리를 지나고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피스토리우스의 그 음침한 교회 앞에서 귀를 기울이다가 
    무엇을 찾는지조차도 모르면서 
    어두운 충동을 감당할 길이 없어 다만 찾고 또 찾았다. 
    나는 매춘부들의 집이 모여 있는 교외를 통과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여기저기 불빛이 남아 있었다. 
    멀리 외곽으로는 신축 가옥과 벽돌더미가 군데군데 잿빛의 눈에 뒤덮여 있었다. 
    마치 몽유병자처럼 낯선 압박감에 몰려 이 황량한 곳을 헤매면서 
    나는 문득 고향의 신축 가옥이 생각났다. 
    그곳은 언젠가 한 번 나의 착취자 크로머가 
    최초의 거래를 하기 위해 나를 끌고 들어간 곳이었다. 
    그와 비슷한 느낌의 집 한 채가 잿빛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문구멍이 나를 향해 꺼먼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고 
    그것을 피하려다 모래와 자갈 더미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러나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더 강렬했으므로 
    그 문을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널빤지와 바스러진 벽돌을 넘어 내가 이 황막한 공간 속으로 휘청거리며 들어서자 
    축축한 냉기와 돌 냄새가 음산하게 코를 찔렀다. 
    모래 한 무더기가 마치 잿빛의 얼룩처럼 눈에 띄는 외에는 
    모든 것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내 곁의 어둠 속에서
    사람이 하나, 조그맣고 야윈 청년이 하나 유령처럼 일어섰다. 
    나는 그가 학교 친구인 크나우어임을 곧 알 수 있었지만 
    머리칼은 여전히 두려움에 곤두서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흥분한 나머지 정신이 산란해진 것 같은 어조로 그가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었어?”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를 찾았던 게 아냐.”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말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몹시 힘들어 목소리는 생기가 없고
     무거운, 얼어 붙은 것 같은 입술에서 간신히 새어나왔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찾았던 게 아니라고?” 
    ”그래, 끌려 들어온 거지. 네가 나를 불렀니? 틀림없이 네가 불렀을 거야. 
    도대체 넌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 지금은 한밤중인데.” 
    그는 야윈 두 팔로 나를 발작적으로 끌어안았다. 
    ”그래, 밤이야. 곧 아침이 되겠지. 
    오, 싱클레어. 나를 잊고 있었던 게 아니었군!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지?” 
    ’대체 무엇에 대해서?” 
    ”아, 나는 정말 추악했었어.” 
    이제서야 겨우 우리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것이 네댓새 전이었던가? 
    내겐 그 일 이후에 벌써 한평생이 지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지금에야 나는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뿐 아니라, 왜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인지, 
    크나우어가 이런 위험스런 곳에서 무얼 하려고 하였는지도. 
    ”너는 자살하려고 했었구나, 크나우어?” 
    그는 추위와 공포에 몸서리쳤다. 
    ”그래, 그러려고 했어. 할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침이 될 때까지 여기 있으려고 했어.” 
    나는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를 시작하려는 옅은 빛이 말할 수 없이 차갑고 냉랭하게 
    잿빛의 대기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꼭 잡은 채 상당히 멀리까지 걸어나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누구에게도 오늘 일을 말해선 안 돼! 
    나는 잘못 된 길을 걸었던 거야. 잘못된 길일 뿐이야! 
    우리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 돼지는 아니야. 
    우리들은 인간이야. 우리는 여러 신을 만들어내고 
    그들과 더불어 싸우고신은 우리를 축복해주는 거야.” 
    우리는 서로 아무 말이 없이 묵묵히 걷다가 헤어졌다. 
    집에 들어오자 날이 희뿌연히 새어왔다. 
    성○○시에서의 그 시절 동안 내가 가진 최선의 것은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풍금 옆인 난로 앞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우리는 아프락사스에 관한 그리스어의 원서를 함께 읽었고, 
    그는 베다에서 번역된 몇 귀절을 내게 읽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신성한 ‘옴’을 부르는 법도 배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이끈 것은 
    그의 해박성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것이었다. 
    나에게 유익했던 것은 
    내가 내 자신의 내부를 발견해내는 일이 현저히 발전된 것이었으며 
    내 자신의 꿈과 사상과 예감에 대한 믿음이 커진 것이었으며, 
    나의 내부에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