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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3장 도 둑 - 5

Joyfule 2008. 10. 2. 01:10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3장 도 둑 - 5 
    그러는 동안 나의 신앙심에는 많은 틈이 생겼다. 
    나의 생각은 데미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긴 했지만 
    전혀 불신자인 다른 동급생들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불신자가 몇몇 있긴 했다.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는 건 가소롭고 인간답지 않은 일이며 
    삼위일체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 따위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인데 
    아직도 이런 촌스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결코 그렇게는 생각지 않았다. 
    나 또한 다소의 의혹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내 유년 시절의 전 체험을 통해 
    나의 부모님이 영위하고 있는 것 같은 
    경건한 생활이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무가치한 일도, 단지 위선일 뿐임도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 여전히 가장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데미안만이 성서적 이야기와 교의에 대해 보다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유희적이고 공상적으로 보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에게 제시한 해석에 나는 언제나 흔쾌히, 즐겁게 따랐다. 
    확실히 많은 생각들이 나에겐 지나치게 거부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카인에 대한 문제 역시 그러했다. 
    언젠가 한 번은 견신례 수업중에 
    그 이상 더 대담할 수는 없으리라고 할 수 있는 견해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선생님은 골고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옛날부터 아주 인상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예수 수난일 같은 때에 
    아버지께서 수난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다음이면 이 고난에 찬 
    아름답고 창백하고 무시무시하면서도 무섭게 발랄한 세계, 
    즉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나는 열렬히 감동되어 살았었다.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신비에 가득 찬 
    세계의 어둡고 힘찬 고난의 광채가 경이로운 선율로 
    내 마음에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느꼈다. 
    오늘에도 역시 나는 이러한 음악 속에서 또 모든 ‘비장한 행위’ 속에서 
    모든 시와 예술적인 표현의 본질을 느끼곤 하였다. 
    그런데 데미안은 그 수업이 끝나갈 무렵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싱클레어, 뭔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읽어봐. 
    그리고 혀로 그 맛을 음미해봐. 좀 김빠진 맛이 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 
    두 명의 도둑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언덕 위엔 세 개의 십자가가 위풍도 당당히 서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잔악한 도둑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감상적이고 종교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그는 죄인이고 누가 봐도 수치스런 행동을 하던 자인데 
    이제 와서 그렇게 쉽게 개심을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무덤을 코 앞에 두고서 그 따위 후회가 무슨 소용이 되니?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한갓 감상적이고도 교화적인 배경을 가진 
    달콤한 속임수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야. 
    만약 나더러 두 도둑 가운 데 한 명을 친구로 고르라고 한다면, 
    적어도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상대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이 눈물을 찔끔거리는 개종자를 택하진 않을 거야. 단연코 다른 도둑을 택하겠지. 
    그는 사내 대장부며 개성이 잇는 자이기 때문이야. 
    그는 자기 처지에서 본다면 단지 아름다운 유혹처럼 느껴질 뿐인 
    개종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거야.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던 거고 최후의 순간까지 
    이제까지 그가 손잡고 있던 악마에게서 비겁하게 손을 놓진 않았거든. 
    그는 적어도 특이한 인물이야. 
    특이한 사람들은 성서 속에서는 흔히 손해를 보게 되거든. 
    아마 그도 역시 카인의 후예일 거야, 그렇게 생각되지 않니?” 
    나는 깜짝 놀랐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얼마나 상상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개성없이 그저 듣고 읽기만 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데미안의 이 새로운 견해는 숙명적으로 들렸는데, 
    그것은 내가 고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관념을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었다.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온갖, 내가 가장 신성하다고 생각해온 것을 전부 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내가 미처 한마디도 하기 전에 내가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네 생각은 벌써 알고 있어.” 그는 단념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건 한갓 옛날 이야기에 불과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
    하지만 여기엔 이 종교가 갖는 근본적인 결함이 잘 나타나 있단 말이야. 
    구약이나 신약 속의 신의 모습은 아주 완전하고 훌륭하지만 
    그것이 본래 나타내야 할 모습이 아니란 것이 문제라고 생각되는 거야. 
    신이란 선하고, 고귀하며 마치 아버지의 존재와 같이 
    아름답고도 높으면서도 다감한 것이다---
    라는 것은 아주 정당한 견해야! 
    그러나 세상에는 또 다른 세계도 존재하고 있단 말이야.
    이 다른 부분은 전부 악마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세상의 이러한 부분의 전부, 
    즉 세상의 절반은 은폐당하고 묵살되어버리고 있는 거야. 
    신을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찬양하면서도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성적인 생활은 전적으로 묵살하고, 악마적인 것, 
    죄많은 것으로 단죄해버리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를 
    인정하고 신성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도식적으로 분리된 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절반만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를 말이야. 
    우리는 신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얘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돼. 
    그래야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내부에 악마까지도 내재시키고 있는 신,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 앞에서도 사람들이 
    그 앞에서 의례적으로 묵인할 필요가 없는 
    그런 신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는 그의 본성과는 반대로 대단히 흥분되어 있었으나 
    곧 진정되어 미소를 짓더니 더 이상 추궁하는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던 소년 시절의 깊은 의혹을 그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말한 공인된 신적인 세계와 금지된 악마의 세계에 관한 생각은 
    바로 나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었다. 
    두 개의 세계, 또는 세계의 두 부분에 관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에 관한 내 자신의 생각과 말이다. 
    나의 문제가 곧 모든 사람의 문제이며 모든 생명과 사색의 근본이 되는 
    문제라는 의식이 무슨 성령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