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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 5

Joyfule 2008. 10. 19. 00:47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 5 
    그는 식탁을 쳤다. 포도주 잔이 넘쳐흘렀다. 
    ”우연이라니! 이것 보시오.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요! 
    아프락사스에 관해서 우연으로 알게 되는 법은 없소.
     그것을 명심하시오. 내가 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주리다. 
    난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좀 있으니까.” 
    그는 말을 멈추고 걸상을 다시 뒤로 밀었다. 
    내가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서가 아니오! 다음번에 이야기하리다.
     ---자, 이거나 좀 드시오.” 
    그러면서 그는 입고 있던 외투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더니 
    군밤 몇 개를 꺼내서는 내게 던져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집어먹으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그래!” 그는 잠시 후에 소곤거리듯 말했다. 
    “어디서 당신은 그 ---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소?” 
    나는 주저없이 이야기했다. 
    ”전 고독했었고 방황하고 있었지요.”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때 저는 옛시절의 친구가 생각났는데 
    전 그가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떤 것을, 지구에서 나오려고 하는 한 마리의 새를 그렸습니다. 
    그것을 그에게 보냈지요. 
    제법 시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을 무렵에 
    뜻밖에도 종이쪽지 한 장이 제 손에 들어오게 되었느느데 
    거기엔 이런 귀절이 적혀 있었어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밤을 까서 술안주로 먹었다. 
    ”한 병 더 하겠소?” 그가 물었다. 
    ”고맙지만 더는 못합니다. 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다소 실망했다는 듯이 웃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난 다르니까. 난 여기 더 있겠소만. 이제 그만 가 보시오.” 
    다음번에 그의 연주를 들은 후 그 사람과 함께 걷게 되었을 때는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는 나를 옛날 골목에 있는 낡고 거창한 집의 
    크고 음산하며 잔손이 가지 않은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피아노를 제외하면 음악에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학구적인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참 책이 많군요.” 나는 감탄하여 말했다. 
    ”그 일부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갖고 온 거요. 
    나는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으니까---이봐요. 
    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당신을 소개할 순 없소. 
    이 집안에서는 내 친구가 그리 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되니까.
    나는 소위 탈선한 자식이지요.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존경할 만한 분으로 
    이 시에서 손꼽히는 목사이자 설교가라오.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나는 재능이 있고 전도가 유망한 
    그의 후계자였는데 탈선을 하고 얼마간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오. 
    나는 신학생이었는데 국가 시험 직전에 이 신성한 신학부를 팽개쳐버린 거요. 
    내 개인적인 공부로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이 학과를 전공하고 있는 셈이오. 
    사람들이 때론 어떤 신을 생각해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여전히 내게는 최고로 중요하고 흥미있는 일이라오. 
    그건 그렇고 나는 현재 음악을 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하찮은 풍금 연주자 자리를 얻게 되겠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교회에서 일하게 되는 거요.” 
    나는 서가에 꽂힌 책을 대충 훑어보았다. 
    조그만 탁상 램프의 희미한 불빛으로 볼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의 표제를 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컴컴한 속에서 벽 쪽의 방바닥에 엎드려 무언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이리 오시오.” 얼마 후에 그가 나를 불렀다.
     “이제 철학 시간을 조금 가집시다. 
    다시 말하면 입은 다물고 엎드려 생각을 좀 해보잔 말이오.” 
    그는 성냥을 한 개비 켜서는 앞에 있는 난로에 종이와 나무를 살라 불을 피웠다. 
    불꽃은 곧 높이 피어오랐는데 그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불을 긁어 일으키기도 하고 장작을 집어넣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너덜너덜한 융단 위에 엎드렸다. 
    그는 물끄러미 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불은 곧 내 마음을 끌어 
    우리는 거의 한 시간쯤이나 널름거리는 장작불 앞에 
    아무 말 없이 엎드려서는 불꽃이 훨훨 타오르고 바지직거리고 
    꺾여지고 휘어지고 가물가물 사그라들다 경련하듯 파닥거리며 
    마침내는 조용히 사위어들어 밑바닥에서 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화도 온갖 발명 중에서 제일 미련스런 발명은 아닌 것 같군.” 
    그는 혼잣말로 한 번 이렇게 중어러렸을 뿐이었다. 
    그 말 외에 우리 두 사람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중된 시선으로 나는 불을 들여다보았고 꿈과 정적 속에 잠겨들었으며 
    연기 속에서 어떤 자태와 재 속에서 무엇인가의 형상을 보았다. 
    갑자기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관솔을 불 속에 던져 넣자 조그맣고 가느다란 불꽃이 솟구쳐 올라왔는데 
    그 속에서 나는 황금빛 새매의 머리를 가진 새를 볼 수 있었다. 
    사그라져가는 난로의 불 속에서 황금빛으로 불에 단 실이 그물 모양으로 엉겨들고, 
    문자와 갖가지 형상과 얼굴, 짐승, 식물, 벌레 그리고 뱀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왔다. 
    문득 정신이 들어 옆에 있는 그를 보니 그
    는 턱을 괴고 엎드려 정신없이, 마치 꿈꾸는 것처럼 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