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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 6

Joyfule 2008. 10. 20. 06:32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5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 6 
    ”전 이제 가야겠어요.”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잘 가시오. 또 만납시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말했다. 
    램프의 불은 어느 샌가 꺼져버렸으므로 나는 간신히 
    컴컴한 방과 복도와 계단을 더듬거리며 
    그 을씨년스런 집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로 나오자 나는 멈춰서서 그 낡은 집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창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놋쇠로 된 조그만 문패가 문 앞 가스등의 빛을 받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피스토리우스 주임 목사” 나는 거기에 씌인 것을 간신히 읽을 수가 있었다. 
    기숙사로 도라와 저녁을 먹은 후 내 조그만 방에 혼자 있게 되자 
    비로소 나는 아프락사스에 대해서나 그밖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피스토리우스에게서 들은 것이 없다는 것과 
    도대체 열 마디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내겐 그의 집을 방문했다는 것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다음 만날 때엔 옛날의 풍금 음악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인 
    북스테후테의 파사칼리아를 들려주기로 약속했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와 함께 그 음산한 넓은 방에서 
    난로 앞에 엎드려 있었을 때 이미 피스토리우스는 최초의 가르침을 시작했었다. 
    불을 들여다보게 한 것은 내게 매우 유익한 일이었는데 
    그 일을 통해 그는 내가 항상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훈련한 적이 없는 
    나의 내부에 있는 기호를 강렬하게 해주고 확인시켜주었던 것이다. 
    부분적이나마 그 일은 점차 분명해졌다. 
    나는 조그만 아이였을 적부터 이미 자연의 기이한 모양을 관찰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모양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진 특이한 매력과 난삽하고도 의미깊은 언어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길다란 목질로 벼한 나무 뿌리, 층이 져 있는
     암맥, 물 위에 뜬 기름의 얼룩, 유리의 섬세한 균열.
     ---이와 같은 온갖 것들이 때때로 내겐 기은 매력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심취했던 것은 물고 불, 연기, 구름, 먼지, 
    내가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빙빙 맴도는 갖가지 빛깔의 무늬였다. 
    피스토리우스를 방문한 후 며칠 동안 그때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그러한 기억이 어떤 흥분과 기쁨, 
    그리고 그때부터 내가 느껴온 나 자신의 감정의 고양감이 훨훨 타오르는 
    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ㄱ서에 의해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을 응시한다는 것은 이상스럽게 마음을 유쾌하고도 만족스럽게 채워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경험은 내가 나의 본래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 
    발견했던 다른 경험에 보태어졌다. 
    어떤 형상을 세밀히 관찰하는 것과 불합리해 보이며 
    난잡하고 괴상하게 느껴지는 자연 형상에 몰두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우리들이 이 형상을 만들어낸 어떤 의지와 조화되어 있는 존재라는 깨우침을 갖게 해준다. 
    ---우리는 극서들이 곧 우리들 자신의 기분이며, 
    우리들 자신의 창조물이라고 여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들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흔들리고 녹아버리는 것을 느끼고 
    또한 우리들의 망막에 맺히는 형상이 외부적인 인상에서 연유된 것인지
    혹은 내부적인 것에 연유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얼마나 우리가 창조자이며, 
    얼마나 우리들의 영혼이쉴새없이 이 세상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고 있는가를
    이 연습에서만큼 단순하고 쉽게 발견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내부에서와 자연의 내부에서 존재하는 신은 동일한, 
    나뉘어질 수 없는 하나의 신이며 만일 외부의 세계가 붕괴되면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그것을 재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과 강, 나무나 잎, 뿌리와 꽃 등 모든 자연의 형성물의 원형은 
    우리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본질은 영원하고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영혼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개는 사랑의 힘과 창조의 힘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나의 관찰이 어떤 책에 증명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침을 뱉은 벽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크게 
    그리고 얼마나 깊이 흥미를 끄는 일인가에 대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일찍이 설파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축축한 벽의 얼룩 앞세서 마치 
    피스토리우스와 내가 불을 보고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우리가 다음 번에 만났을 때 그 풍금 연주자는 내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한계를 너무 좁게 책정해버리는 경향이 있소. 
    우리는 우리가 개성적인 것이라고 일컫고 
    다른 것과 판이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개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들은 누구나가 다 이 세계의 온갖 축적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오. 
    우리들의 육체가어류나 더 이전의 생물체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 
    발달의 계보를 지닌 것처럼 우리들의 영혼 속에도 이제까지 
    인간의 영혼 속에 살아왔던 온갖 것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오. 
    이제까지 존재해왔던 모든 신들과 악마들은, 
    그것들이 설령 그리스인들에게 있었건, 중국인들에게 있었건, 
    혹은 쑬루카퍼인들에게 있었건간에 모두 어떤 가능성으로서, 소망으로서,
    방편으로서 우리들 내부에 존재하며 또 다른 곳에도 존재하고 잇는 것이오. 
    만일 조금도 교육받지 못한 한 명의 평범한 아이만을 남기고 전 인류가 멸망해버린다 해도 
    이 아이는 사물의 전 과정을 다시 발견해낼 것이오. 
    여러 신과 악마와 낙원과 게율과 금제와 구약, 신약 등, 
    이 모든 것들을 그 아이는 다시 창조해낼 수가 있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