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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4.

Joyfule 2008. 11. 2. 01:18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제7장 에바 부인 4.   
    우리는 꽤 늦게서야 시냇가의 정원 앞에서 멈춰섰다.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네.” 데미안이 말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한번 방문해주게. 
    우리는 자네를 몹시 고대하고 있으니.” 
    기쁜 심정으로 나는 냉랭해진 밤공기 속에서 먼 귀로를 재촉했다.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주 즐거움을 나타내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나의 고독한 생활 사이에서 격리감과 
    때로는 조소에 가까운 대립감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오늘 같은 침착성과 내밀한 힘으로 
    그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사소한 관계일 뿐인지를, 
    내게 있어서 그 세계는 이미 얼마나 멀리 사라져버렸는지를 느낀 적은 없었다. 
    나는 내 고향의 관리들, 늙고 신분높은 신사들을 상기했다. 
    그들은 마치 행복한 낙원의 추억처럼 
    음주로 허송한 그들의 대학 시절에 대한 추억에 집착했고, 
    마치 시인이나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유년 시절에 바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대학 시절의 이제는 사라져버린 ‘자유’를 예배하곤 했었다.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행여 자기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게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도록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자기의 과거 시절 어느 곳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삼 년간 폭음을 하고 환성이나 지르다가 기어들어와서는 
    관청의 성실한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건 부패했다. 우리들의 나라는 부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대학생들의 이런 바보짓마저 그밖의 수백 가지의 일보다는 
    좀더 영리하고 좀더 질이 좋은 편에 속하는 것이긴 했다. 
    멀리 떨어진 숙소에 도달해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 모든 생각은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내 온 정신은 오늘이 나에게 해준 한 가지 약속에 
    목을 늘이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데미안의 어머니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술을 퍼마시거나 얼굴에 문신을 하거나 
    이 세상이 모조리 썩어 그 몰락을 기다리든 말든간에---
    그것이 내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단 한 가지, 
    나의 운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마중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곤하게 잤다. 
    새로운 날이 나에게는 엄숙한 축제일로서 시작되었고 
    그것은 유년 시절의 성탄절 축제 이래 경험하지 못한 그러한 날이었다. 
    나는 내심 불안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게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날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고, 
    주위의 세계가 변화하고, 기대하고 있으며, 
    연관에 차 있고, 엄숙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 느낄 수 있었다. 
    소슬히 내리는 가을비조차 아름답고 고요하고 
    기꺼운 음악에 가득 차 있는 축제일의 분위기를 더하게 했다. 
    생전 처음으로 외부의 세계가 
    나의 내부의 세계와 순수하게 일치된 음향을 울리고 있었다. ---
    영혼의 축제일이 시작될 것이었고,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어떤 집도 어떤 진열장도 골목의 어떤 얼굴도 나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은 당연히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있을 뿐이었지만 
    옛날의 눈에 익은 공허한 모습이 아니라 
    기대에 차 있는 자연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으며 
    운명을 맞아들일 준비를 경건하게 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대축일의 아침에 나는 그런 세계를 보곤 했었다. 
    세계가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의 내부 속에 들어가서 사는 일이나 
    외부의 것에 대한 의미는 내게서 멀어져버렸다. 
    눈부신 빛의 상실은 유년 시절의 상실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영혼의 자유와 
    성인이 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이 사랑스러운 빛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체념하는 데 나는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은 단지 
    파묻히고 어둠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과 
    자유롭게 된 사람이나 유년 시절의 행복을 포기한 사람으로서도 
    이 세계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어린아이의 관찰의 내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황홀하게 느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