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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 일리아드 (liad)★ 몰락하는 트로이아 성

Joyfule 2006. 3. 20. 06:36

호메로스 : 일리아드 (liad)★ 몰락하는 트로이아 성 온종일 트로이아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들은 다음 날의 거룩한 잔치를 준비하느라고
신전을 떡갈나무와 은매화 가지로 치장했다. 준비가 거의 끝나자 어둠이 내렸다.
사람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날이 뜨기 전이었다. 어둠에 묻힌 채 그리스 선단이
테네도스 섬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노잡이들은 소리도 없이 노를 젖고 있었다. 비좁은 목마의 뱃속에 다닥다닥 붙은 채 웅크리고 있던 우뒤세우스 일행은
잔뜩 긴장한 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논도 신전의 벽 위에서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아가멤논 대왕이 지휘하는 선단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단에서 배들이 해변에 접근했다는 신호를 보내면 시논은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에게 그것을 알리기로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다음이라서 트로이아는 고요에 묻혀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왔다. 바다 저쪽의 어둠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시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 위에서 뛰어내린 그는 목마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목마는 달이 떠오르면서 은빛으로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목마의 배 밑에 숨어 있는 특공대원들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에페이오스가 목마의 소나무 빗장을 열자 뚜껑 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밧줄이 내려왔고 그 밧줄을 타고 메넬라오스와 오뒤세우스
그리고 디오메데스를 비롯한 특공대원들이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들은 무장한 유령들처럼 소리 없이 신전 앞에서 성의 정문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는 문지기들을 죽이고,
물밀 듯이 밀려오는 그리스 전우들을 위해 성문을 활짝 열었다.
잠든 트로이아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병사들로 이루어진 검은 물결은 곧 불꽃의 강이 되었다. 횃대를 하나씩 든 병사들이 정문 초소에서 불을 옮겨 붙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횃불을 들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다. 잠을 자고 있다가 엉겁결에 무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리스 군을 맞은 트로이아 군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어둠 속으로 아이들과 여자들의 비명이 퍼져 나갔다. 방패로 내려치고 칼로 베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불길은 삽시간에 성 전채로 번져 갔다. 흡사 바람을 받고 번지는 들불 같았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목마의 배에서 내려온 뒤로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우토메돈을 비롯한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린 디오메데스는
왕의 침실을 찾아 내었다. 바깥을 지키던 경호병들은 순식간에 몰살을 당했다. 그들은 지붕으로도 횃불을 던져 올렸다. 지붕 위에서 경호병들이 묵직한 기왓장을 벗겨
아래로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방패로 가린 채 그들은 도끼로 문을 두들겼다. 빗장이 부서져 내렸다. 청동 돌쩌귀가 부서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스 군은 안마당과 침실과 기둥사이를 누비면서 앞을 가로막는 경호병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였다. 어떤 빗장도 어떤 칸막이도 어떤 칼도 그들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이 복도 저 복도로 몰려다니던 그들은 마침내 가장 안쪽 뜰 앞에 이르렀다. 뜰에는 가정의 수호신을 위한 제단이 있고, 그 위로는 우람한 월계수 고목이 붉게 물든 하늘을
가리기라도 하듯 제단을 덮고 있었다. 왕비와 왕자들은 바로 그 안뜰에 한 덩어리로 있었다. 흡사 폭풍우 몰아치는 날 둥우리에 오구구 모여 있는 비둘기 떼 같았다. 하지만 그 안뜰도 그들의 피난처는 되지 못했다. 제단 앞에 꿇어앉아 신들에게 기도하고 있던
노왕 프리아모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길과 전쟁의 광기에 취한 젊은 병사 하나가 프리아모스 왕의
한 수염을 잡고 제단 계단으로 끌어내리고는 단칼에 왕의 몸을 갈랐다. 그의 못에서 용솟음친 피는, 그가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곤 하던 제단을 적셨다. 그리스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왕가의 여자들을 끌어 내었다. 성 안은 온통 불바다였다. 사방에서 죽고 죽이는 소기가 들려 왔다. 벽이라는 벽, 지붕이라는 지붕은 모조리 내려앉았다. 십여 년이나 버티어 온 막강하던 트로이아 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헬레네는 왕가의 여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불붙은 나무 조각들이 비오듯 쏟아지는 왕궁 속을 샅샅이 뒤지다 데이포보스의 집을 찾아갔다.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왕자가 데이포보스인만큼 헬레네가 거기에 있을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었다. 그 집 앞에 이르는 순간 메넬라오스는 집을 제대로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데이포보스는 가슴에 창을 맞은 채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데이포보스의 피 웅덩이에서 시작된 핏빛 발자국이 현관을 지나 건너쪽의 어두운 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가 그는 오뒤세우스를 보게 되었다. 오뒤세우스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중앙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나 있는 창으로는 지붕을 태우는 불길이 보였다. 그의 팔목은 검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메넬라오스는 칼을 뽑아 든 채 문 앞에 서서 물었다. "헬레네는 어디에 있소? 만일에 그대가 헬레네를 숨기고 있다면‥‥‥." 오뒤세우스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오늘 아침 그대는 내게 맹세했소. 내가 요구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주겠다고 말이오. 그것이 무엇이든." "그럼 요구하시오. 그러면 그것은 그대 것이 될 것이오. 나는 맹세를 어기는 사람이 아니오.
지금이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기는 하오만‥‥‥." 오뒤세우스가 말했다. "나는 <예쁜 뺨> 헬레네의 목숨을 요구하오. 나는 이 목숨을,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례로 헬레네에게 돌려줄 것이오. 내가 <트로이아의 보물>을 찾아 이 성으로 들어왔을 때
헬레네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소." 그 큰 방 안에 오랫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벽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어서
더욱 무시무시한 침묵이었다. 그 때 헬레네가 옷자락을 모아 쥐고 숨어 있던 구석 자리에서 앞으로 나섰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발이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헬레네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내밀어 메넬라오스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메넬라오스는 선 채로 헬레네를 내려다보면서 자기를 배신하고
파리스에게 가던 일, 집을 비우고 자식을 버리고 떠나던 일을 떠올렸다. 오뒤세우스에게 했던 약속만 아니라면 단칼에 죽였을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뒤세우스에게 한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 때문에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메넬라오스는 여전히 선 채로 헬레네를 내려다보면서 파리스가 오기 전에 서로 나누었던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 속에서 연민과 사랑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가 뽑아 들고 있던 칼이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는 헬레네를 일으켜 세웠다. 헬레네의 하얀 팔이, 불타는 트로이아의 연기 때문에
연방 기침을 해대는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새벽이 왔다. 트로이아는 재가 되어 있었다. 아테나의 신전도 거대한 목마도 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금과 은, 상아와 보석을 나누어 가졌다. 프리아모스 왕은 왕가 수호신의 제단 앞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스 병사들 손에 죽음을 당한 트로이아 병사들의 시체는
거리에 쌓인 채로 개들과 독수리 떼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아의 여자들은 선단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MENELAUS AND HELEN 안드로마케가 등을 떠밀리면서 뮈르미돈의 새 주인이 기다리는
배에 오르고 있을 즈음, 헥토르의 아들은 이미 성의 망대 밑에 떨어진 채 죽어 있었다. 절망을 느낀 안드로마케가 던졌던 것이었다. 카산드라 공주는 등을 떠밀리면서 아가멤논의 배에 올랐다. 불화의 여신이 한 알의 사과를 던진 이래,
그 모든 불화의 씨앗 노릇을 해왔던 헬레네만이 지아비 메넬라오스의 배로 모셔졌다. 노예로서 등을 떠밀린 것이 아니라 왕비로 모셔진 것이었다. 오랜 포위 공격전은 이렇게 해서 끝이 났다.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그리스 대선단은 얕은 물길로 나섰다. 노잡이들은 흥겨움에 젖은 채 노를 저었다. 그들의 뒤에 남은 것은 물떼새의 울음 소리와
여전히 연기가 솟는 트로이아의 폐허뿐이었다. 선단은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 항구를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