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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달팽이 인간의 마지막 도착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달팽이 인간의 마지막 도착지 나와 친한 고교선배가 있다.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 그는 컴퓨터의 자판조차 치지 못한다고 했다. 고위직 법관으로 있을 때 비서가 다 해주는 바람에 배우지 못했다고 얼마 전 만난 그 선배의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남편이 그 나이에 주민센터 컴퓨터 교육반에 등록했어요.아침 열시부터 오후 여섯시까지 점심도 먹지 않고 컴퓨터 공부를 하고 있어요.”​ 노인이 하루에 여덟시간 이상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원래 그런 기질이었다. 고시 공부 시절 삼복 더위에 다락방에서 옷을 벗고 공부하다가 궁둥이 살이 뭉개지면서 팬티의 섬유와 뒤섞인 채 굳어져 응급실에 간 적도 있었다. 그는 사법고시 수석합격자였다. 노력뿐 아니라 그는 좋은 머리도 물려받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 정도 쯤이야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이 정도 쯤이야 차를 타고 가면서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가수 김수철씨의 강연을 무심히 듣고 있었다. 나의 뇌리에는 작달막한 남자가 커다란 기타 뒤에서 양다리를 앞뒤로 활짝 벌리고 폴짝 뛰던 광경이 남아 있다. ​ “벌써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지 오십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그 세월 동안 매일 두 시간 이상 기타 연습을 해왔습니다. 나이 먹은 지금도 합니다. 향상을 위한 게 아닙니다. 유지하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심지가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너무 가벼웠던 것 같다. 그의 강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어요. 돈이 안 나오더라도 한가지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수가 돈이 없다고 해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에너지를 쏟..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은 겨울을 견디는 나무 사십대 중반쯤 검진센터 의사로 부터 암 선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막막했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고 화가 났었다. 그렇지만 나의 능력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불운을 인정하고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장기 하나를 떼 버리고 살아났다. 단념하니까 행운이 온 것 같기도 했다.​ 오십대 초반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부작용의 확률이 0.02퍼센트도 안 되는 안전한 수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작은 확률에 걸렸다. 대학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 눈알에 주사침을 박고 약을 집어넣었다. 일년 후 다시 탈이 났다. 이번에는 안구에 넣었던 인공렌즈가 마음대로 자리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다른 대학병..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들이 남긴 향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들이 남긴 향기 법무장교 동기생 중의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 그는 나이를 먹었어도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동기생들에게 사과 한 상자씩을 택배로 보냈다.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가 죽은 후 문 앞에 덩그라니 남은 사과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 그의 빈자리같았다. 마음이 애잔했다.​ 법무 장교 훈련 시절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했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군대 시절 내가 모략을 받은 적이 있다. 보안부대에서 내가 뇌물수수의 혐의가 있다고 첩보를 올린 것이다. 아마도 지역 보안부대장과 싸운 것이 그런 보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당시 그 기관은 국가권력의 정점이었다. 그곳에서 흰걸 검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육군본부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나만 불행한 것 같을 때 그 모자가 다급하게 한 번만 더 돈을 꿔 달라고 했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얻었는데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이도저도 안 되면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그 모자는 우연히 알게 된 의뢰인이었다. 미용사였던 엄마가 사채업자에게 걸려들어 어린 아들과 도망 다녔다. 찜찔방을 전전하면서 돈이 없었다. 아들에게는 라면을 사 먹이고 엄마는 물에 불린 건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웠다. 모자는 마지막에 노숙자가 되어 서울역 앞 광장으로 내몰렸다. 변호사인 나는 그 모자를 위해 사채업자와 싸움을 했다. 사채업자는 판사 앞에서도 독을 내뿜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모자를 묶었던 악마의 사슬을 풀어주었다.​ 모자는 작은 음식점을 차렸다. 매일 밤을 새우면서 몇백개씩의 만두를 빚었다.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가 있을 자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가 있을 자리 아름다운 마음 한 조각을 담은 댓글을 보았다. 연휴에 노가다 일을 하며 먼발치에서 평화로운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고 했다. 돈이 없어 여행을 못하지만 일하는 자리에서 파란 하늘을 보고 들꽃과 나무를 본다고 했다. 먼발치에서 평화로운 모습들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여행과 결을 같이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일을 사랑하고 마음의 제단에 음악을 바치고 산다고 했다. 마음이 열리고 영혼의 눈이 열린 성자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이든 주변이 평화로운 색깔로 물들 것 같다. 일정표에 끌려다니고 인증샷으로 자랑하기 위한 여행은 의미가 없는게 아닐까.​ 자유로운 영혼이 무한한 시공간을 돌아다니며 지극히 평온한 제자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원한 가치를 가진 화폐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원한 가치를 가진 화폐 몇몇 친구들이 일본 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 중 한 친구는 수시로 스마트 폰을 통해 증권시세를 살폈다. 내 눈에는 돈에 묶여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사무실 근처 주차장 앞에서 붕어빵을 만들어 파는 남자를 보았다.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밀리는 손님 때문에 오줌을 참아가면서 붕어빵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몫 좋은 그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비오는 날이나 휴일에도 그 자리에 나와 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일식집을 경영하는 부부도 냉면집 주인도 고깃집 노인도 돈이 들어오는 계산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큰 빌딩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 돈은 많지만 사건 사고로 항상 전전긍긍이다. 임차인들과 소송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한 달에 들어오는 임..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지구별 나그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지구별 나그네 바닷가에서 다양한 여행객을 본다. 파도 소리가 스며드는 밤바다의 해변에 작은 텐트를 치고 희미한 등불 아래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검은 바다와 밤하늘이 붙은 짙은 어둠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닷가 외진 소나무 숲 끝자락에 캠핑카를 세워두고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작은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말없이 밤을 지새는 사람도 종종 본다. 인적이 드문 곳, 참된 고독을 맛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자연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방랑하는 정신’들을 발견한다. ​공직에 있던 삼십대 후반 제네바로 출장을 가서 한달 가량 그곳에 혼자 묵은 적이 있었다. 저녁이면 붉은 노을이 스며드는 레만호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노동자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벗들과의 정담(情談)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벗들과의 정담(情談) 한 집안의 소송을 맡았다가 우연히 그들 조상의 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조선의 선비였던 조상은 과거의 일차 시험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묵으면서 이차 시험을 준비했던 것 같다. 그 선비는 엉뚱한 취미가 있었던 것 같다. 공부보다는 벗들과 정담을 나누는 걸 더 즐거워했던 것 같다.그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그가 지은 노랫말에 당시 장안 기생들이 곡을 붙여 부르면서 히트가 된 것 같다.​그 선비가 한양의 성균관에서 보낸 세월이 십 년쯤 흘렀다. 다른 선비들은 과거에 합격을 해서 벼슬길로 나섰는데 그만 낭인이 되어 혼자 남았다. 성균관의 마당에 낙엽이 떨어지던 가을 어느 날이었다. 키가 후리후리한 선비 한명이 손에 술병을 들고 그 선비를 찾아왔다. 이미 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누워서 빈둥거리기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누워서 빈둥거리기 내가 묵는 실버타운 로비 엘리베이터 옆에는 중국식 자단나무 의자가 두 개 나란히 놓여 있다. 바닥은 딱딱하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게 앉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졌다. 조선의 왕이 앉는 의자도 반듯하게 앉도록 만들어진 것 같다. 단정한 위엄을 나타내도록 하는 유교 사회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의자들은 사람이 단정하게 앉게끔 설계되어 있다. 의자의 다리를 낮추거나 적당히 자르면 대번에 앉기가 훨씬 좋아진다. 의자는 낮으면 낮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어머니 생전에 의자의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낮추어 드렸었다.​나는 요즈음 침대에 길게 누워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을 보고 밤이면 검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노란 달을 보기도 한다. 누워서 천정의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래 그럴 수 있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그래 그럴 수 있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와 호소하는 사람마다 “세상이 왜 이래요?”하고 말하곤 했다. 정의가 강물같이 흘러야 하는데 왜 그렇지않느냐고 내게 따졌다. 내가 매일 법정에서 보는 세상은 더러운 흙탕물로 가득 찬 늪 같은 세상이었다. 나는 내게 따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본래 그런거야 그럴 수 있어’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나는 혼자서만 고통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이같이 투정 부리는 사람들이 싫다. 그 누군들 아프지 않아본 사람이 있을까.​가수 양희은 씨가 ‘그럴 수 있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는 기사를 봤다. 삶에서 일어난 불행에 대해 토달지 않으려는 그녀의 입버릇 같은 말이다. ​내가 고등학교 이학년 시절 어둠침침한 독서실에서 양철도시락의 찬밥을 점심으로 먹고..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하나님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죠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하나님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죠 추석을 하루 앞두고 정선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팬션에 가족이 모였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다. 정선의 시골장에서 사온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정원에서 숯불에 구워 먹었다. 오일장에서 사온 양념한 고들빼기와 김치도 깊은 맛이 스며 있었다. 초등학교 삼학년인 열살짜리 손자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놀린다.​“할아버지 배는 완전 농구공이야.”​“맞아 그런데 손자도 배구공쯤 되네”​“히히”​녀석의 앞니 사이의 넓은 틈이 눈에 들어온다.​“손자 요즈음 뭐가 즐겁니?”​내가 물었다.​“있죠. 저 고백 받았어요. 교회에서 만난 여자아이가 있는데 나를 좋아한다고 그래요.”​“너는?”​“나도 좋아하죠.”​“그럼 잘해줘라. 괜히 으시 대고 잘난 척..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대통령들의 좋은 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대통령들의 좋은 꿈 옛날에 썼던 메모지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부분이 있다. 김영삼대통령 초기였던 것 같다. 청와대에서 근무를 하는 친구가 모임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대통령이 저녁은 칼국수와 반찬 하나로 하라는 지시가 내렸지. 주방에서 난리가 났어. 반찬을 하나로 하면 김치인데 간장을 내놔야 하는 건지 아닌지를 놓고 말이야.”​그 말을 듣고 내무부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말했다.​“전에는 안 그랬는데 장관 회식에서 갑자기 국수를 시키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밑의 직원들은 삼겹살을 먹고 싶어도 그걸 말하지 못하는 거야.”​대통령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미치는 영향이었다. 대통령들마다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 꿈과 의욕이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어떤 대통..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동은 행복인가?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동은 행복인가? 내가 있는 바닷가의 실버타운에는 미국에서 역이민을 온 노년의 부부들이 있다. 미국에서 수십 년을 살던 그들은 고국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 중에는 육십년대 이백 달러를 가지고 나가 백만불이 넘게 벌어 고국으로 왔으니 괜찮지않느냐고 하는 분도 있다. 옛날에 시골에 살던 사람이 서울가서 돈 벌어 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이민을 가서 고생했다는 그들은 노년에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를 찾은 것 같다. 미국의 집을 그대로 두고 임대한다는 분도 있고 평생 저축한 돈을 은행에 두고 관리한다는 분도 있다. 그들은 노년을 동해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살다가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막연한 낭만적인 꿈과 현실의 그들이 하고 싶은 게 좀 다른 것 같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억울함에 대하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억울함에 대하여 고교 동창생이 구속 된 적이 있었다. 그 부인이 찾아와 변호를 부탁하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같은 학교를 나왔는데 우리는 왜 이런 거야?”​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변호사인 나와 비교가 된 것 같았다.​또 다른 고교 동창이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그는 잘생긴 데다가 운동도 잘하고 주먹도 강했다. 그는 재벌집 아들인 동창에게 잘 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재벌가의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그가 목이 잘렸다. 회사 내에서 횡령이 있었다는 것이다. 횡령한 돈으로 룸쌀롱을 드나들면서 재벌가의 아들같이 행동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 몇 년 후 그가 외판사원이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나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를 사무실 근처의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서 냉면을 먹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