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206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이 보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인간이 보여  부장판사를 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판사를 할 때는 죄인만 보였는데 지금은 인간이 보여. 그 가족이 우는 것도 보이고 말이야. 변호사로 교도소에 가서 오랫동안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니까 마음이 흘러가는 거야. 내가 다시 판사를 한다면 예전같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명절때 이왕이면 그 전에 석방 시켜주는 배려도 할 거야. 높은 의자에 앉아있을 때는 그게 보이질않았거든”​광어는 한쪽으로만 눈이 몰려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법조인도 그런 것 같다. 검사는 범죄자를 보고 이면에 어떤 악성과 죄를 숨기고 있을 가에 관심을 두고 시선을 집중한다. 미꾸라지같이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하다 보니 자칫하면 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강도에게서 배운 철학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강도에게서 배운 철학  변호사인 나는 남들이 혐오하는 파충류 같은 존재들을 검은 지하 감방에서 종종 만난다. 의사가 흉하게 부서진 환자를 보듯. 오래전 청송교도소에서 만났던 한 강도범의 얘기를 쓰려고 한다. 백팔십센티의 큰 키에 근육질의 그는 교도소 죄수 천 팔백명의 대장이었다. 한밤중에 칼을 들고 그가 내 방을 찾아왔다면 아마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낮에 감방안에서 만나면 아무렇지도 않다. 그는 나를 만나자 마자 이렇게 말했다. ​“스물다섯살 혈기 왕성한 때 감옥에 들어와서 지금 나이 사십입니다. 앞으로 칠 년쯤 더 살아야 합니다. 건달 친구가 한탕만 잘하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유혹에 빠졌었죠.” ​“강도한 내용을 알고 싶은데요.”​나는 그가 사람을 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학폭의 고해성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학폭의 고해성사  중학교 시절 나는 불량학생이었다. 담배도 배웠고 술도 마시기 시작했다. 태권도와 유도도장을 나갔었고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칼을 맞고 무기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억울했지만 그동안 나의 불량한 행적에 대한 결과였다. 나에게 폭행을 당한 몇 명을 지금도 기억한다. 만날 수 있으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싶다.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 때를 놓쳤다. 가까운 한 친구가 내 사무실공간을 빌려 소박한 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김밥과 과자 그리고 와인을 곁들인 모임이었다. 장소는 빌려주었지만 나는 손님중 하나였다.그 모임에 온 삼십명 가량 중 구석의 한 사람이 어쩐지 눈에 걸렸다. 옷차림이 초라해 보이는 사십대 중반쯤의 작달막한 남자였다. 삶에 지친 표정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리한 아흔살 노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리한 아흔살 노인  내가 묵는 실버타운에는 건강한 구십대 노인들이 여러명 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역사다. 비가 내리던 어제 나는 바닷가의 까페에서 그중 한 노인과 스파게티로 점심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내 나이 또래의 생존율이 오퍼센트인데 나는 그 중에 들었어. 학교 동창회도 없어지고 연락되는 친구가 없어.”​그의 말에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는 승리감 비슷한 게 들어 있었다. 그가 지나온 삶을 말하기 시작했다.​“육이오 전쟁이 끝나자 미국으로 건너갔지.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부정부패가 심했어. 나는 그런 나라가 싫었어. 떠나면서 침을 뱉고 다시는 안돌아오겠다고 결심했지.​미국으로 가보니까 육이오 전쟁 때 고관들이 자식들을 빼돌려 대학..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잘 익은 열매가 된 노인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잘 익은 열매가 된 노인들   실버타운에서 친해진 팔십대 노인과 점심을 먹고 난 후 정원의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오십년간 약을 연구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아내와 함께 귀국한 분이다. 자식이 없는 그는 고국에 죽으러 왔다고 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팔십대 과학자 노인의 일상이 궁금했다.​“한국에서도 강의를 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제가 그동안 강의해 온 동영상이 있는데 그걸 정리하고 있어요.”​그는 자신이 하던 일을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것 같다. 그가 덧붙였다.​“틈틈이 피아노를 쳐 왔는데 작곡을 배우고 싶어요. 고등학교 동기회에서 글을 쓰라고 해서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쓰기로 했어요.”​실버타운이나 주민센터 그리고 노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경찰청장의 죽음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경찰청장의 죽음   며칠 전 경찰청장을 했던 그의 부고를 받았다. 그는 한(恨)을 품고 죽었을 것 같다. 그는 자기를 수사했던 검사를 고소했다. 그 수사는 불이 붙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꺼져버렸다. 그의 한(恨)은 변호사였던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충의 내용은 이렇다. 그는 관직을 마친 후 한 선거에 입후보자로 등록했었다. 여론조사 결과 당선이 틀림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기의 표밭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청와대 출신이 유력한 경쟁후보로 등록을 한 것이다. 당선이 눈앞에 보이던 그에게 먹구름이 끼었다.​투표 며칠 전 갑자기 그의 집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 수색이 들어오고 검찰의 과거 뇌물혐의에 대한 전격적인 수사가 개시됐다. 그의 대학 동기인 나는 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책으로 다가온 신(神)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책으로 다가온 신(神)   이십대 중반 어느 날 밤 나는 하얀 눈이 두껍게 덮인 휴전선의 산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수은주가 영하이십도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 무렵 나의 내면도 차디찬 고드름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희망이 꺽인 채 군대에 끌려와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주위를 보면 배경이 있는 집 아들이 군대에 온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의사들은 적당한 병명을 붙여 있는 집 아이들을 보호했다. 조선시대부터 군대는 상놈의 자식들만 갔다.​밤새 순찰을 마치고 새벽 여명이 밝아올 무렵 나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부하인 김 중사가 두꺼운 수첩 같은 책 두권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기독교 단체에서 공짜로 보내온 성경인데 종이가 얇고 부드러워서 찢..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마음의 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마음의 눈   매일 아침 해변가를 산책하다 보면 바다가 토해놓는 것들을 본다. 신기하다. 누군가 버린 쓰레기들을 바다는 도로 인간 세상에 반환하고 있다. 낚시꾼들이 바다에 흘린 가짜 물고기가 달린 낚시 바늘도 바다는 파도를 시켜 모래사장에 도로 가져다 놓는다. 바다는 살아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다. 바다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흐트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노인들이 길다란 집게를 들고 바다가 토해낸 쓰레기들을 다시 자루에 담아가는 모습을 본다. 마음의 눈으로 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할까. ​내 나이 이십대쯤 안개가 피어오르던 어느 봄날이었다. 바라크 창고같이 썰렁한 고시원 뒤 야산에 올라가 있던 나는 연두색으로 풀리기 시작하는 나무들 사이에서 싱싱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 안의 나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내 안의 나   아파트에서 은거하며 혼자사는 칠십대 중반의 노인을 안다. 그는 모든 걸 내면에 들어와 있는 영에게 묻고 나서 행동 한다고 했다. 며칠전 그의 여동생이 병원에 있는 사실을 내가 우연히 먼저 알고 그에게 전화를 해 주었다.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속에 있는 영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는 그렇다고 냉정하거나 비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밝고 명랑하고 따뜻한 면을 가졌다.그러나 친구를 만날 때도 외출할 때도 자신의 속에 있는 영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그는 전 재산을 부인에게 주고 부인을 떠났다. 자식과도 멀리 떨어져 지방 도시에 방을 얻어서 혼자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살다가 조용히 죽겠다는 것이다.그는 최고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별나라 여행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별나라 여행   일주일 사이에 여러 명이 죽었다. 고교동창의 부고도 있고 친구의 부인이 죽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까 더 이상 죽음이 생소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죽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먼 나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경을 보면 인생 칠십이고 강건해도 팔십이라고 한다. 백세시대라고 말은 하지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수명은 칠십대에서 대충 끝이 나는 게 아닐까. 나는 운 좋게 기본적인 수명은 확보했고 지금은 하루하루를 보너스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산다는 게 뭘까. 진짜 살아있으려면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나는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본다. 사십대 중반까지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자아가 강했다. 그러다 암을 선고받고 수술대 위에서 깨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버려진 천재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버려진 천재   그가 타슈겐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떨어지는 낙엽은 자리를 가리지 않는 것일까. 그가 머나먼 생소한 나라에서 끝을 맺었다. 그가 눈을 감을 때 혹시 그 여자가 옆에 있었을까. 그는 불운한 천재였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먹구름이 끼었던 인생이었다. ​어느날 그는 다섯살 때쯤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고 피를 토해내듯 말했다. 그날 엄마 손을 잡고 사람들이 붐비는 재래 시장을 갔었다고 했다. 어느 순간 엄마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진 듯 발을 동동거리며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보면서 모두 안타까운듯 혀를 찼다. 몇 시간을 울면서 눈물 콧물이 얼굴에 범벅이 됐을 때 바로 그 앞 양복재단을 하는 가게 남자가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는..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여장군 할머니   변호사를 하면서 사십년 가까이 죄인들과 만났다. 종종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판사 앞에서는 반성했다고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해요.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예요.나는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이 아프지를 않아요. 남들은 아프다는데 나는 왜 그렇죠?”​그렇게 말하는 그는 진심이었다. 악마가 스며들어 양심을 제거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평생을 도둑질만 해 온 사람과 얘기를 했었다. 그는 어려서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은수저를 훔친 것을 시작으로 팔십 노인이 돼서도 전원주택을 털러 다니고 있었다. 도둑질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유있을 때에도 그는 그 짓을 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도벽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웃으면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결혼의 의미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결혼의 의미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독히 싸우는 전쟁터에서 자라났다. 두 분은 본질적으로 가치관이 다른 분이었다. 어머니는 출세한 사람이나 부자를 부러워했다. 평생 가난한 말단 회사원인 아버지를 원망하고 무시했다. 아버지의 침묵 속에는 그런 어머니를 속물로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아침은 어머니의 승리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떤 노골적인 모멸도 돌부처 같이 묵묵히 들으면서 감수했다. 그러다 저녁에 술이 들어가면 광분했다. 온 집안이 부서지고 집기가 날아갔다. 어머니를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함경도 에서 자란 어머니는 후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악다구니를 하면서 끝까지 덤비다 피를 흘리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이 왜 결혼을 했는지 의문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식..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정치거물 앞의 무력한 판사들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정치거물 앞의 무력한 판사들   야당 대표 이재명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는 결정문에서 그가 개발 사업에 관계가 있었다고 볼만한 상당한 의심이 있다고 했다. 유죄의 심증이다. 위증교사 혐의도 소명됐다고 했다. 증거인멸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판사는 당대표이고 직접 증거가 부족해 구속하지 않는다고 했다.​담당 판사의 결정문은 세상의 눈과 몸보신 사이를 법기술적으로 비겁하게 빠져나간 것 같다. ​일반 형사범을 변호한 적이 있었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절규했다. 어떤 직접적인 증거도 없었다. 재판장은 중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직접 증거가 있어야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법은 정황증거만 가지고도 실체적 진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변호사로서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괜찮은 불륜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괜찮은 불륜   변호사사무실을 오랫동안 하면서 수많은 사랑에 관한 사건을 경험했다. 그중에서 결혼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 사건 하나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한 언론인이 방송에 출연했다가 사회를 보던 여성 아나운서와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유부남과 유부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이 발각됐다. 남편은 여성 아나운서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리고 그 언론인을 상대로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는 위자료 소송을 제기했다. ​어느 날 그 여성 아나운서가 유서를 써놓고 한강으로 갔다. 두 남자가 그 사실을 거의 동시에 알게 됐다. 그 여성은 진짜 다리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성격이었다. 여자가 죽음의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 시각 두 남자의 행동이 달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