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Joyfule 2022. 11. 27. 06:52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절)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의 이름을 달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기는 선한 행위로 사마리아 운동을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선한이라는 수식도 사람이 붙였을 뿐 사실은 어떤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3)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해 보려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이 됩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했느냐고 물으시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나이다 하고 대답합니다(눅10:10:26-27) 그래 맞다 그럼 그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말씀하십니다(눅10:28) 이 말씀은 그렇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 사람의 무지가 탄로가 나는 사건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옳은 것을 증명하려고 그러면 네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고 묻습니다(눅10:29) 횡적으로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묻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율법에 속고 사람들의 말에 속아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줄 아는 의식으로 가득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영생은 바로 그 사람의 코앞에 와 계시잖아요. 율법의 수건에 감겨 부활이시며 생명이시고 천국인 그리스도이심을 보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선한 일로 영생을 얻으려는 착하디 착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하다면 그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틀림없이 강도겠지요? 강도는 목숨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돈이나 소지품만 노립니다. 근데 행위를 강조하는 강도는 영생과 상관없는 그 무엇을 하게 하는 업무로 구원팔이를 하고 영생팔이를 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이웃이며 형제인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문밖에 세워 놓고 행위와 물질의 풍부함으로 치장해 놓은 건물 안에서 할렐루야 예수 부활하셨네 장차 우리도 저렇게 부활하여 공중에서 혼인잔치에 참여하겠네 하고 일 년치 염원을 하루에 왕창 쏟아 붓고 또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고 일거리를 찾아 나서도록 합니다. 자신이 옳게 보이려는 애쓰지만 강도만난 자인 줄 모른 채 말입니다. 강도를 맞고 또 강도 노릇을 하고 있는 줄 까맣게 모르는 기독교의 현실이 개탄스럽지 않습니까? 말씀을 순종하여 주를 따르라고 하지만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고 성령을 받지 못했는데 그 말씀이 체화가 되어 삶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해서 영생을 얻을 이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장자이신 자신의 영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시는 영원한 형제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십니다(히2:11) 그 형제인 주님을 사랑하므로 영생을 얻어 그 증거로 이웃의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요일3:14-16) 따라서 마르다처럼 주님을 모셔 놓고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면 안 됩니다. 마리아는 차분하게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눅10:38-39) 결국 부활의 주님께 까지 따라갑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받고 말씀을 받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죠. 그로 인해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의 자비를 받은 자가 되어 강도 만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죠.


 마르다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고 분주하므로 강도 만난 자들의 전형입니다. 율법 교사는 영생이신 주님을 모른 채 선한 업무로 영생을 얻으려는 돌팔이 선생입니다. 강도를 만나 생명을 잃은 것을 모른 채로 업무만 재촉하는 공사판 감독과 흡사합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 위해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을 영접하여 사랑하는 겁니다. 진리의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화신이 되는 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돌보아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자가 자비를 베푸는 사마리아인을 만나 살아나는 거죠. 강도 만난 자가 사랑할 이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자비를 받은 우리로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풀어 강도 만난 자들을 살려 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