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골짜기 (In the Ravlne) 3. - 안톤 체홉

Joyfule 2010. 4. 17. 08:51

 골짜기 (In the Ravlne) 3. -  안톤 체홉    
 
 장남 아니심은 축제 때 말고는 집에 들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그 고장 사람 편에 곧잘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는 언제나 누구 다른 사람이 달필로 대필한 것이었는데, 
반드시 편지지 한 장에 청원서와 같은 격식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아니심이 평소 이야기할 때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말투로 쓰여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께서 즐겨 드시라고 
새싹으로 만든 고급 차 1파운드를 보내드리나이다.'
편지마다 끝에는 다 닳아빠진 펜으로 찍찍 긁은 것같이
 '아니심 그리고리'라고 서명이 되어 있고, 그밑에는 달필로 '대필'이라 쓰여있었다. 
이런 편지가 올 때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 몇 번씩이고 소리를 내어 내용을 읽었다. 
노인은 감동해서 으레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집에서 살기가 싫은가봐, 
워낙 학문이 있는 사회에서 출세했으니까 말이야. 
뭐 좋도록 하라지! 사람은 각각 제 갈 길이 있으니까."
사육제를 앞두고 어느 날, 우박 섞인 큰비가 내린 적이 있었다. 
노인과 바르바라는 바깥 형편을 살펴보려고 창가로 갔다가 
놀랍게도 아니심이 역에서 썰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것을 보았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아니심은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듯 한 초조한 기색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그뒤에도 계속 변하지 않았고, 
어쩐지 자포자기하는 듯한 데가 있었다. 
별로 출발을 서두르는 눈치도 없어서, 
혹 근무처에서 목이 잘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바르바라는 그의 귀가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능청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아니심?" 그녀가 말했다.  
"스물 여덟살이나 되어 가지고 여지껏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ㅉㅉㅉ..." 
옆방에서는 그녀가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씨로  'ㅉㅉㅉ...' 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노인과 악시냐에게 귓속말로 무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마치 음모라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야릇하면서도 곡절이 있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니심을 장가 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 글쎄!...동생은 벌써 장가를 들었느데..." 바르바라가 말했다. 
 "형이 되어서 마치 시장에 내다 놓은 수탉처럼 언제까지 이렇게 짝없이 지낼 셈이야, 
제발, 색시만 얻으면 뒷일은 다 잘되게 되어 있어. 
아니심은 근무처로 나가고 색시는 집에서 집안일을 거들면 되잖아. 
아니심 같은 젊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 생활에 절도가 없어서 안돼. 
아무래도 우리 큰아들은 세상의 순리를 몽땅 잊어버린 사람 같이 보여. 
이거야 원, 정말이지 결혼을 하지 않고 늙어가는 건 죄악이라구."  
그리고리 가의 남자가 장가를 들 때에는 
부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얼굴이 예쁜 색시감을 골랐다. 
그래서 아니심의 색시감도 예쁜 처녀가 선택되었다. 
아니심으로 말하자면, 
그는 볼품없이 생겼을 뿐 아니라 주변머리도 전혀 없는 남자였다. 
허약하고 병자 같은 체격에 키도 작았고, 
두 볼은 공기가 잔뜩 든 것처럼 볼록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눈을 깜박거리지 않아서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붉은 턱수염은 거칠게 자라 있었고, 
무슨 생각에 잠길 때에는 수염을 이빨로 자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더욱이 그는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것이 표정에나 걸음걸이에 역력히 나타났다. 
이런 사내인 데도 신부감이 나섰다는 것, 
그것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좋아. 나도 아주 볼 줄 모르는 건 아니니까. 
우리 그리고리 가의 남자들은 워낙 풍채가 좋으니까 말이야."
시의 변두리에 트루구에보라는 마을이  있었다. 
최근 그  마을은 절반이 시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로 편입된 쪽의 땅에 작은 집을 짓고 사는 어떤 과부가 있었다. 
그 과부에게는 날품팔이를 하며 살아가는 리파라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리파가  미인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트루구예보에 소문이 나 있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하여 청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차 어디 나이 많은 늙은이나 상처한 홀아비가 
그녀의 가난을 탓하지 않고 색시로 데려가든지, 
아니면 구냥 막 돼먹은 사내에게 시집갈 거라고 사라들은 말했다. 
바르바라는 중매장이 여자로부너 이 리파의 이야기를 들은 죽시 
마차를 타고 트루구예보에 가보았다.
이윽고 격식대로 리파의 이모네 집에서 자쿠스카와 포도주를 차려 놓고 선을 보았다. 
리파는 선을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새로 맞춘 장미빛 옷을 입고, 
머리에는 불꽃 간은 느낌을 주는 새빨간 리본을  화려가게 매고 있었다. 
화사하고 품위있는 얼굴에 날씬하고 가냘픈 몸매의 처녀였는데, 
노천에서 노동을 한 탓으로 얼굴은 햇볕에 그을어 있었다. 
얼굴에서 슬픈 듯한 수줍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눈매에는 호기심이 섞인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젓가슴께가 겨우 사람의 눈에 띌 종도로 작은 계집애였다. 
그러나 결혼에 지장이 없을 만큼은 나이가 들어 있었다. 
정말 상당한 미인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대장간의 집게처럼 축 늘어진, 사내처럼 턱없이 큰 두 손이었다. 
  "지참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바르라라는 리파의 이모에게 말했다. 
"우리  둘째 아들 스테판도 가난한 집안에서 색시를 데려다 짝을 지어주었느데. 
지금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훌륭한 며느리랍니다. 
집안일도 그렇고 장사일도 그렇고, 대단한 일꾼이예요."  
리파는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어째든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믿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학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날품팔이인 그녀의 어머니 플라스커비야는 
겁에 질린 나머지 부엌 한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젊었을 적에 어느 상인 집에 마루를 청소해 주러 다녔는데, 
어느 날 상인이 무슨 일로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그녀를 꾸짖었다. 
그때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놀랐었느데, 
그후부터 그녀의 마음은 공포에 사로잡혀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공포 때문에 언제나 손발이 떨리고, 볼은 실룩실룩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는 부엌에 앉아서 손님들이 무슨이야기를 하는지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이마에 대고  때때로 성상쪽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얼큰하게 취한 아니심이 부엌으로 난 문을 열고 서슴없이 말했다. 
  "어머니, 왜 그런 데에 앉아 계세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우리들이 영 심심하고 지루하군요."
  그러자 플라스코비아는 더욱더 두려워져서 
바싹 마른 가슴에 두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어머, 별말씀을... 점말로  너무 과분한 혼담이 되어놔서요."   
맞선을 본 뒤에 곧 결혼식 날이 정해졌다. 
결혼날을 잡은 뒤로 아니심은 집에 있을 때면 
줄곧 휘파람을 불면서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마치 
땅 속까지 투시하려는 것처럼 쏘는 듯한 시선으로 마룻바닥을 응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