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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쓸쓸한 당신 6. - 박완서

Joyfule 2010. 5. 25. 04:42
     너무도 쓸쓸한 당신 6. -  박완서    
남편은 잠시 놀란 듯하다가 금방 덤덤해지더니 전철을 타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말없이 남편 뒤를 따랐다. 
상실감을 메우려고 너무 허둥거리고있는 자신이 딱했지만 
어차피 오늘은 빗나가기 시작한 거 가는 데까지 가볼 작정이었다.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전철 노선은 오래된 노선보다 한결 시원하고 정결했다. 
왕십리에서 국철로 갈아타고 종점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야 한다고 
남편은 양해를 구하듯이 앞으로 이용할 교통편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듣는 척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편보다 더 서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어렵게 확보해놓은 단골을 잃게 될까봐 
처음 자리잡은 가게를 한 번도 옮긴 적이 없었다. 
주로 아파트에 사는 단골들은 물론 자주 바뀌었다. 
잃은 만큼 얻어지는 게 단골이었으니 단골이 꾸준히 있다는 게 중요하지 
단골이 누구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사를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단골들 덕이었다. 
그녀는 좁은 가게 안을 요령껏 편안하게 꾸미고 
단골들이 필요한 것 없이도 들러서 수다를 떨고 싶은 곳으로 만들었다. 
근처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고 나서 그녀의 가게 앞은 백화점 버스정류장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가게에 들어와서 구경하는 척하다가 백화점 버스가 오면 
냉큼 나가 타던 단골들이 이제는 탈 때도 내릴 때도 그녀의 가게를 못 본 척하게 됐다. 
마치 거기 가게가 없는 것처럼. 
국철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을 여러 번 올라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은 좁고 숨어 있듯이 외진 데 있었다. 
지상은 아직도 해가 지기 전이었다. 
고층건물 모서리에 걸려 있는 석양은 괄한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쩌자고 국철을 기다리는 정류장엔 해가리개 하나 없는 노천이었다. 
차를 태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벌을 세우기 위해 마련한 정류장이다 싶었다. 
그러나 햇볕이 온종일 달군 시멘트바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당하건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듯 
방기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편의 대머리가 둔탁하게 빛나면서 다시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만지면 송진처럼 찐득할 것 같은 땀이었다. 
생각만 해도 싫어서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국철은 전철처럼 자주 오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시멘트 기둥에 열차 시간표가 써 있었다. 
이십 분에 한 번씩 오기로 돼 있었다. 
그녀는 이건 더위를 견디는 게 아니라 굴욕을 견디는 거라고 생각했다. 
참고 기다린 보람은 있어서 국철 안도 지하철 안과 다름없이 서늘했다. 
그러나 국철 구간의 풍경은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시골 같지도 않고, 도시 같지도 않은, 
단지 버려진 것 같은 들판으로는 걸쭉하게 썩은 샛강이 흐르기도 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굽은 다리를 받쳐주기 위한 육중한 시멘트 기둥들이 
질척한 늪지대에 괴기스럽게 뿌리내리고 있기도 했다. 
녹슨 쇠붙이, 썩은 널빤지가 함부로 버려진 쓰레기 더미 사이를 비집고 
기승스럽게 자라는 풀들은 독초처럼 잔뜩 약이 올라 
저만치 폐가처럼 썰렁한 집들을 위협하는가 하면, 
갑자기 네모난 단층집 동네가 철로에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빨래가 널린 옥상과 백일홍, 맨드라미가 빨갛게 피는 마당이 사람 사는 동네다우나, 
서운케도 열차를 향해 주먹질을 하는 동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깨달음처럼 국철 구간하고 
남편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거기 타고 있는 사람들이 
지하철 승객하고는 인종이 다른 것처럼 이상해 보였다. 
남편은 자는지, 자는 척하는지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그녀에게 아들을 빼앗긴 상실감은 마치 허방을 밟은 것처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순탄한 길을 걷다가도 휘청거릴 나이에 이런 허방이 숨어 있을 줄이야. 
허방치고는 너무도 깊은 허방이었다. 
그녀는 한없이 추락중인 삶의 허방에서 움켜쥔 
한 가닥의 지푸라기를 바라보듯이 어이없어하며 자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곧 많이 내리는 역에서 그녀는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으로 남편을 흔들었다. 
얼떨결에 밖으로 따라나온 남편은 한 정거장 더 가야 종점이라면서 다시 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층층다리 쪽으로 거세게 잡아끌며 말했다. 
“갈 데가 있어서 그래요.” 
“어딜, 별안간?” 
“그애들은 오늘 신혼여행 가서 마냥 재미볼 거 아뉴? 우리도 기분 좀 내봅시다. 
바라니에 가봤댔자 모기밖에 누가 우릴 반겨주겠어요.” 
채정이가 바라니 갈 때마다 모기약을 사나르던 생각을 하며 말했다. 
“바라니로 가잔 것은 당신이었소?” 
남편이 침착하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휭하니 앞장을 서더니 돼지갈비 집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대신 천장에서 옛날 비행기 프로펠러처럼 생긴 선풍기가 돌아가는 집이었다. 
식탁마다 지글대는 불갈비 위로 후드가 바싹 내려와 있건만도 넓은 홀이 연기로 매캐했다. 
마침 저녁시간이기 때문인지, 혹시 잘하기로 소문난 집인지, 
거의 빈자리 없이 시끌시끌하고 활기차 보였다. 
남편이 어릿어릿하지 않고 익숙하게 구는 것도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재미 좀 보자는 걸 겨우 돼지갈비 정도로 이해한 남편을 
속으로는 한심해하면서도 수굿이 따른 것은 별안간 의식하게 된 심한 허기증 때문이었다. 
근수로 주문한 돼지갈비와, 숯불이 이글대는 풍로와,
밑반찬만 갖다줄 뿐 나머지 일은 다 셀프서비스였다. 
남편은 알맞게 익은 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서 접시에 옮겨주는 일에서부터 
석쇠를 새걸로 가는 일까지 하나도 그녀에게 안 시키고 척척 혼자서 잘했다. 
가끔 영양보충하러 오는 싸고 잘하는 집이란 설명도 했다. 
옷서부터 머리카락까지 돼지갈비 냄새에 푹 절 만큼 포식을 하고 나오면서 
남편은 이렇게 먹어도 계산은 얼마 안 나온다고 또 한 번 싼 타령을 했다. 
그런 남편을 돌아보지도 않고 앞서 나온 그녀는 마침 
갈비 집 앞에서 손님을 내려놓은 택시를 잡고는 남편을 손짓해 불러 먼저 밀어넣었다. 
얼떨결에 올라탄 남편 곁에 앉자 어디 경치 좋은 
러브 호텔로 가자고 외눈 하나 까닥 안 하고 말했다. 
러브에다 유난히 힘을 주어 말하고 나서, 
“당신 그런 데 처음이죠?” 했다. 
“당신은 처음이 아닌 것처럼 구는구려.” 
“그래요. 저도 처음이에요.” 
그녀는 오금을 박듯이 힘주어 말했다. 
그런 데 한 번도 못 가봤다는 걸 서로 믿을 뿐만 아니라 설사 
어느 한쪽이 거기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고 해도 
바람피우러 들어간다는 의심도 안 할 위인들이었다. 
그래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은 부부란 말인가. 
왜 이 지경까지 되고 만 것일까. 
스산한 낭패감으로 잔뜩 추스렸던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다행히 택시를 한강이 바라보이는 별장 풍의 삼층집 앞에 대준 
운전기사의 태도만은 노골적으로 그들을 늙은 잡것들 대하듯 했다. 
마냥 끌고 다닌 끝이었다. 
그래도 앞장서서 택시값도 치르고 프런트로 간 것은 남편이었다. 
잠시 쉬었다 가시게요? 
아니오, 하룻밤 묵어갔으면 하오, 하는 소리에 고개를 붉히며 
그녀는 돌아서서 복도 끝 창밖으로 그제서야 해가 지고 
말간 맨얼굴을 드러낸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돈도 많구려.” 
키를 받아든 남편을 쭐레쭐레 따라가다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꺾이는 곳에서 멈춰선 그녀는 약간 시비조로 말했다. 
세상에 없는 구두쇠로만 알아온 남편이 저녁값은 물론 
호텔비까지 선선히 지불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여유있는 돈이 있을 턱이 없는 남편이었으므로 
구두쇠 노릇을 민망하게 여길지언정 미워한 적은 없었다. 
서로 의심할 건덕지가 아무것도 안 남은 무관심한 부부 사이건만 
돈 문제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민감하다는 데 
그녀는 스스로도 놀라고 한편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