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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0

Joyfule 2010. 8. 20. 10:32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10  
다섯째 회상
<독일 신학>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흘러나온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요, 
  그것은 한낱 우연이며 광채이며 반사일 따름이로다.   
  존재란 완전자 안에만 있음이라.   
  따라서 우연, 광채, 반사처럼 흘러나온 것은 
  진정한 존재도 아니며 존재를 지니고 있지도 아니하다.   
  존재란 그 광채를 유출시키는 불꽃이나 태양, 빛 안에만 있음이라.
그렇지만 신성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그것이 비록 불꽃의 잔광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쨋든 신적인 실체를 자신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나는 광채 없는 불꽃이나 빛이 없는 태양, 또는
피조물 없는 창조주가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문제들을 여실히 밝혀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 어떤 피조물을 막론하고 신의 뜻과 
심오한 충고를 알고 체득하고자 갈망하는 것은, 
바로 아담의 행적과 악마의 행적을 갈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신성의 반영으로 느끼고,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비춰 주는 신의 빛을 발밑에 놓거나 꺼 버려서는 안 되고, 
그 빛이 주변 만물을 두루 비추어 주고 
따뜻이 해 주도록 한껏 발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혈관 속에 살아 있는 불꽃을 느끼고 
삶의 투쟁을 향한 한 단계 높은 영감을 느끼게 되지요.   
아무리 하찮은 의무라도 우리에게 신을 상기시키며, 
세속적인 것이 신적인 것으로, 무상한 것이 영원한 것으로,
우리의 온 생이 신 안에서의 생으로 화하는 겁니다.   
신은 영원한 휴식이 아니라, 생명이랍니다.   
안젤루스 실레지우스는 신에게는 의지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는 실상 이런 점을 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한다, 
<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그러나 보라, 신은 뜻을 갖고 있지 않음을, 
신은 영원한 정적임을.
그녀는 차분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떼었다.
당신의 신앙은 건강하고 힘을 지니고 있어요.   
하지만 삶에 지쳐 안식과 수면을 갈망하는, 
당장 신에게로 돌아가 영원히 잠든다 해도 
세상에 대해 아무 애착도 아쉬움도 느끼지 않을 만큼, 
너무나 큰 고독에 빠져 있는 영혼들도 있답니다.   
지금이라도 아주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다면, 
거룩한 안식이 찾아오리라는 예감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겐 세상과의 유대도 없고, 
휴식에 대한 소망 말고는 그 어떤 소망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휴식은 지고의 선, 신이 휴식이 아닐진대,
   나는 바로 신 앞에서 두 눈을 감으리.
아무튼 당신은 <독일 신학>의 저자를 부당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저자는 외형적 삶의 무상함을 고시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멸되기를 원치는 않았어요.   
제 이십 팔 장을 좀 낭독해 주세요.
내가 책을 들고 읽는 동안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진실로 합일이 이루어져 실재하게 되는 곳에서는, 
   그 합일 가운데서 내적 인간은 활동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외형적 인간으로 하여금
   이리저리, 이승에서 저승으로 움직이게 하시니라.   
   이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고 진실로 그렇게 돼야 하노라.   
   따라서 외형적 인간은 진실로 이렇게 말하게 되리라.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는 것과 죽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행동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이런 일체의 것들은 저의 뜻이 아니옵니다.   
   저는 오로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을
   행하거나 감내하면서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고 순종할 따름이옵니다.>
   이렇듯 외형적인 인간은 왜라고 따지며 묻거나 요구하지 않으며, 
   묵묵히 영원하신 분의 뜻에 만족해야 할지니라.
   진실로 내적 인간은 움직이지 않으며, 
   외형적 인간이 필연적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음은 주지된 바이로되, 
   내적 인간이 움직여 왜라고 따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 역시 영원하신 분의 뜻에 의해 정해진 필연일 따름이니라.   
   하나님 자신 인간이 될 수 있거나 인간이 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이니라.   
   이 사실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알아불 수 있음이라.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와 그 빛 안에서 합일이 이루어지는 곳에선 
   정신적 교만이나 경솔한 방종, 분방한 기질을 볼 수 없으려, 
   그곳엔 오로지 끝없는 겸허함, 무한히 자신을 움츠린 우려의 마음, 
   단정함과 성실, 평등과 진실, 평화로움과 만족스러움 
   요컨대 덕성에 속한 일체의 것이 자리하게 되느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합일은 이미 아니로다.
    다만, 실로 세상의 어느 것도 이같은 합일을 도와 주거나 그것에 종사치는 않느니라.   
    마찬가지로, 그 합일을 교란시키고 방해할 것도 아무것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것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은 오로지 
    인간 자신이 내세우는 인간의 뜻뿐이기 때문이로다.   
   이점을 유념할지라.
거기까지면 됐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이로써 이제 우리는 서로 이해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미지의 저자는 책의 다른 대목에서도 더 분명히 말하고 있답니다.   
즉 어떤 인간도 죽음을 앞두고 동요가 없을 수는 없다고요.   
아무리 신화된 인간이라도 신의 뜻이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는 한낱 신의 손, 또는 신이 거하는 집과 같다구요.
신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신의 상태를 잘 알면서도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마치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듯, 신 안에서의 자신의 삶을 지키지요.   
내게는 곧잘 나 지신이 저 창밖으로 보이는 백양나무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저 나무는 저녁이 되면 잎새 하나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서 있지요.   
그러다 아침 바람이 불면 잎새들이 마구 흔들리지요.   
하지만, 나무 둥치와 가지는 조용히 의연히 서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을이 오면 한때 떨고 있던 모든 잎새가 시들어 떨어집니다.   
그리도 둥치만은 새로운 봄을 기다린답니다.
그녀는 이같은 세계에 이토록 깊이 은둔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나는 굳이 그런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긴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사념의 요지경 속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토록 많은 고뇌와 노고가 주어졌는데, 
도저히 떼어낼 수 없이 그녀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몫이 
과연 올바로 선택된 것인지는 나도 알 수 가 없었다.
이렇게 매일 저녁 우리에게는 새로운 대화가 열렸고 그런 저녁이 거듭될수록 
이 가늠할 수 없는 정서를 지닌 여인을 들여다보는 나의눈도 떠졌다.   
그녀는 내 앞에 아무 비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언어는 순전히 전신의 사고와 느낌 자체였다.   
그녀가 입 밖으로 내는 말은 모조리 
수년 동안 그녀의 삶을 동반하며 성숙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마치 한아름 꺾어 모은 꽃을 서슴없이 잔디 위에 
다시 던지는 어린애처럼, 자신이 수집한 생각을 남김없이 털어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처럼 기탄없이 내 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어쨌든 이 사회는 관습이니 예의니, 분별이니 현명함이니, 생의 지혜니 하는 
이름을 붙여 우리에게 끊임없는 거짓 놀음을 요구하며 
우리의 생 전체를 일종의 가장 무도회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가.   
이런 거짓 놀음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아무리 뜻이 있다 해도, 
자신의 본연의 진실을 온전히 되찾아 가진 사람들이 실로 몇이나 될까?
심지어 사랑까지도 고유의 언어를 말하지도, 
고유의 침묵을 그대로 침묵하지도 못하며, 
시인의 상투어를 배워 열광하거나 한숨 짓고 일시적 유희를 벌인다.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고, 서로를 바라보며 헌신할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런 점을 솔직히 털어놓고, 
당신은 나를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게 간절한 나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진실 그대로 구현할 말이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오기 전에, 바로 최근에 얻은 아놀드의 시집을 그녀한테 남겨 두고
<파묻힌 생명>이라는 시를 읽어 보라고 청했다.   
그것은 나의 고백이었다.
이어서 나는 그녀의 침대 곁에 꿇어앉아  안녕히 주무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녀도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하며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내 온몸에서는 전류가 흐르듯 전율이 느껴지고, 
어린 시절의 꿈들이 내 마음속에서 펄럭이며 날개짓을 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날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깊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영혼의 평화가 그림자처럼 내 마음을 두루 덮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일어서서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사나운 바람 속에 서 있는 백양나무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뭇가지에서는 한 잎의 잎새도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