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8

Joyfule 2010. 8. 18. 10:32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8  
다섯째 회상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 심경은 완전히 말로 옮겨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긴 기쁨과 슬픔의 극치의 순간에는 누구나가 홀로 연주하는
<말없는 생각>이라는 곡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내 느낌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산화되고 마는 유성처럼 날고 있었다.   
때로는 꿈을 꾸면서도, 지금 너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
너는 살아 있다.   
그리고 그녀는 엄연히 실재한다고.   
그리고 분별과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면서, 
그녀는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애인이야, 
실로 비상한 정서를 지닌 여인이야,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또한 그녀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휴가 기간 동안 그녀의 곁에서 지내게 될 즐거운 저녁 시간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나, 아니, 그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내가 구하고 생각하며, 희망하고 믿었던 모든 것이 아닌가.
여기에 마침내 한 인간의 영혼이 - 
투명하고 신선한 영혼이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본 첫 순가에 나는 그녀의 전부를, 
그녀의 내부에 감취진 모든 것을 알아보았었다 - 
우리는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의 수호 천사는?
그 천사는 대답이 없었다.  
떠나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천사를 재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지상에 단 한 군데밖에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부터 어름다운 삶이 열렸다.   
매일 저녁 나는 그녀를 방문하였고,
우리는 곧 서로가 진정한 옛 친구임을, 
서로<두우>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사이임을 절감했다.   
우리는 서로 지금껏 늘 함께 어울려 살아왔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쨋든 그녀가 켜는 감정의 현 치고 이미 나의 영혼 속에서 울리지 않은 음이 없었고,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치고 그녀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응해 오지 않은 생각은 없었다.
그전에 언젠가 나는 우리 시대의 저명한 음악가 한 사람이 
자기 누이랑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저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의 악상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 결코 한 음부도 화음을 깨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지, 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스스로 늘 그렇게 생각했듯이, 
나의 내면이 가난하고 공허한 것이 아님을 발견했던 것이다.   
다만 그 모든 씨앗과 꽃봉오리를 발아시키고 개화시킨 햇빛이 못내 아쉬웠다.   
실상 나와 그녀의 영혼을 꿰뚫고 간 그 봄은 얼마나 우수에 찬 계절이었던가!
흔히 5월에는 이제 곧 장미가 시들리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그 계절에는 매일 저녁 
꽃잎이 하나씩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그 소리를 알아듣고 그 얘기를 입 밖에 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날이 거듭할수록 점점 진지하고 무게를 더해 갔다.
어느 날 저녁, 내가 막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견신례 날 이 반지를 당신한테 드렸을 때, 
이미 곧 세상을 하직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토록 여러 해를 살아오며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일을 누리다니요.
물론 괴로움도 많았지만.   
하지만 그런 것은 잊게 돼요.   
이제 진정으로 작별의 시간이 임박해 온 것은 느끼면서 
한 시간, 일 분이 이렇듯 소중하게 생각될 수가 없어요.   
안녕히 가세요.   내일 늦지 않도록 하세요.
어느 날인가는 그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한 이탈리아 화가가 와 있고, 그녀는 그 사람과 이탈리아 말로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그 남자는 예술가라기보다는 한낱 기술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향해 상냥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뭇 존경의 염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니 
타고난 그녀의 진정한 귀족 품격이, 고결한 영혼이 엿보였다.   
화가가 가고 나자 그녀는 내게 말했다.
지금 그림을 한 점 보여 드릴께요.   
당신도 좋아할 거예요.   
원본은 파리 미술관에 있는 거랍니다.   
이 그림에 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아까 이탈리아 화가한테 사본을 그려 받았어요.
그녀는 내게 그림을 보여 주고 나의 촌평을 기다렸다.   
그것은 고전적 독일 의상을 입고 있는 중년 남자의 초상화였다.   
그림의 주인공의 표정은 몽상적이고 겸허한데다가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이어서,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 생존했던 인물로 보였다.   
그림의 전경의 색조는 대체로 어두운 갈색, 
그러나 배경은 풍경으로 지평선에 막 솟아오르는 첫 아침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밖에 그 그림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대체로 안정감을 주는 인상이어서 
몇 시간이고 싫증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도 이 그림을 능가할 수 없을 겁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라파엘이었다 해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진 못했을 거예요.
정말 그래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왜 이 초상화를 갖고 싶어했는지, 연유를 들어 보세요.   
이 그림의 화가가 누구인지, 
초상화의 모델이 누구인지는 미상이라는 내용을 읽었어요.   
그렇지만 모델은 필시 중세기의 한 철인일 것이라는 추측이에요.   
그런데 바로 이런 초상화가 나의 화실에 필요했거든요.   
당신도 아다시피, 저<독일 신학>의 저자가 미상이잖아요?   
또 그 사람 초상화도 전해져 오는게 없구요.   
그래서 이 미지의 화가가 그린 미지의 인물의 초상화가 
과연<독일 신학>의 저자로 어울리는지 한 번 맞추어 보고 싶었던 거예요.   
당신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이 그림을 <알비 파>그림과 
<보름스 국회>장면 사이에다 걸어 놓고
<독일 신학의 저자>라는 제목을 붙일까 해요
좋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다만 이 인물은 프랑크푸르트 사람 치고는 
좀 너무 정력적이고 남성적으로 보이는 군요.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어쨋든 나처럼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 생명한테는 
이 책이 많은 위안과 힘을 퍼내어 주었답니다.  
이 책한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요.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기독교 교리의 참된 비밀을 간명하게 알게 되었거든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였든간에 그의 가르침을 믿고 안 믿고는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느낌이에요.   
그의 교리는 내게 아무런 외형적 강요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교리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사로잡았어요.
그래서 계시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 것 같았어요.
많은 이들로 하여금 참된 기독교 정신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요인은
다름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계시가 미처 다가오기도 전에 
기독교 교리가 먼저 계시를 앞세우는 데 있는 것이랍니다.   
그것은 나를 자주 불안하게 하는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내가 우리 종교의 진실성과 신성을 의심했다는 뜻은 아니예요.   
다만 남들이 공짜로 가져다 주는 믿음에 대해서는 내게 권리가 없다는, 
또 이해도 못하면서 유아 적부터 배워 수용한 믿음은 
진정으로 내 것이 아니라는 그런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 주거나 죽어 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믿어 줄 수는 없는 게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