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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9

Joyfule 2010. 8. 19. 10:57
 

   
독일인의 사랑 -  막스뮐러 9  
다섯째 회상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기독교 교리는 사도들이나 초기 기독교 교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서서히 거역할 수 없이 우리 마음에 스며 들어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그것은 어떤 막강한 교파의
범접할 수 없는 율법이 되어 유아기 적부터 우리에게 다가와, 
이른바 신앙이라는 맹종을 강요하고 있지요.   
바로 여기에 수많은 치열한 갈등의 근거가 있는 겁니다.   
모름지기 사고하는 능력과 진실에 대한 경외김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는 
어김없이, 늦도 빠르든간에 의혹이 고개를 들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쟁취하려는 올바른 도정에 있는 동안에도, 
늘 우리의 마음에는 의혹과 불신이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어
새로운 생명이 펼쳐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나는 어느 영어 책에서 이런 귀절을 읽었어요. 
라고 그녀가 끼어들었다.    
진리가 계시로 나타나는 것이지 계시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내가 <독일 신학>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어김없이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어요.   
그 신학서를 읽었을 때, 나는 그 책이 말하는 진리의 힘에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 교리에 귀의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니,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계시받았던 것이지요.   
또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구요.
진리는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나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미지의 저자의 가르침이 한 줄기 광채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 내면의 눈을 뜨게 하고, 
막연했던 예감을 명징하게 내 영혼 앞에 보여 주었던 겁니다.   
그렇게 일단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를 느끼고 난 연후에, 
나는 복음서를 읽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것 역시 미지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간주하고 말이지요.
그것들은 신비한 방식으로 성령에 의해 사도들에게 불어넣어진 영감이며,
종교 회의에서 인준을 받았고, 카톨릭 신앙의 최고 권위로 
인정받은 것이라는 등의 선입견을 되도록 내 머리에서 몰아내었어요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며, 
기독교 계시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신학자들이 아직껏 우리에게서 종교라는 것을 모조리 앗아 가지 않은 것이 
차라리 이상스러울 지경이지요 라고 내가 말했다.    
만약 진정한 신앙인들이 정색하고 다가서서
<이 정도까지만, 더 이상은 안 돼요>라고 말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마 종교를 몽땅 앗아 갈 겁니다.   
어느 교회에든 하나님의 종복이 있어야겠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의 종교치고, 목사며 바라문, 샤먼, 불고승이나 라마승,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 같은 부류들에 의해 부패하고 파괴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교구의 십중팔구 신도들은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서로 물고 뜯고 싸웁니다.   
그리고 자신부터 복음의 영검을 받아,
그 영감으로 다른 이들을 교화시킬 생각은 않고, 
복음서들은 영감을 받은 자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니 
어디까지나 진리라는 장황한 증거나 수집하기 급급합니다.
하지만 그런 증거라는 것은 그들 자신의 
미흡한 신앙을 미봉하는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지요.   
스스로가 한층 경이로운 영감을 받아 보지 못한 마당에, 
복음서 저자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대체 그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영감이라는 하늘의 은총을 초대 교회 장로들한테까지 연장시키고, 
심지어는 종교 회의 결의에서 다수를 차지한 이들에게까지 그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금 문제가 제기됩니다.   
쉰 명의 주교 가운데 스물 여섯 명은 영감을 받았고 
스물 네 명은 영감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 필사적 조처를 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축복의 안수를 통하여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영감과 무류성을 이어받고 있으며, 무류성이나 다수의 원칙, 
성령등은 일체의 내재적 확신이나 헌신, 신앙상의 직관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연결 고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명백하게 맨 처음의 의문이 되돌아옵니다 
즉, B가 A만큼, 또는 그 이상의 영감을 받지 않은 경우, 
어떻게 B는 A가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
왜냐하면 B자신이 영감을 받았음을 아는 것보다 
A가 영감을 받았음을 아는 데는 더 큰 능력이 요구되니까요.
나 자신은 그렇게까지 명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사랑에 관한 한, 타인이 사랑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아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했어요.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짜라는 징표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답니다 -
즉, 스스로 사랑을 아는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사랑을 알 수 없다구요.   
또 그가 자신의 사랑을 맏는 한도 내에서만 타인의 사랑도 믿게 되는 것이라구요.
사랑의 은총이 이렇듯, 아마 성령의 은총도 같을 겁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을 때, 
당사자는 하늘로부터  폭풍이 몰려오는 듯 
엄청난 굉음을 들으며 불이 난 듯 혓바닥이 녹아 내림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아닌 남들은 혼비백산하며 오해를 하거나,
 <당신 취했군요>라고 놀려 대개 일쑤입니다.
아무튼 이미 말했듯이 내가 나의 산앙을 굳히게 된 것은
 <독일 신학>의 덕분이예요.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책의 결함이라고 지적한 요소가 
오히려 내게는 확신을 주었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옛 스승은 자신의 교리를 
결코 엄밀하게 논증하려고 애쓰지 않았거든요
그는 씨뿌리는 농부처럼, 단 몇 알의 씨앗이라도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천 갑절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냥 자신의 교리를 뿌린 거랍니다.
그 신학의 스승이 그런 식으로 자기 교리를 굳이 입증하려 애쓰지 않은 이유는 
그가 지닌 인식이 그만큼 충만했기 때문일 겁니다.   
논증이라는 형식을 묵살할 만큼......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스피노자의<윤리학>에 나타난 놀라운 논증의 연쇄를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경우에서 보듯, 지나치게 소심한 논증의 전개는 오히려 
그 예리한 사상가께서 진심으로는 자신의 학설을 믿을 수 없었던 게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물의 코 하나하나를 
그토록 용의주도하게 묶을 필요를 느꼈던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기는 해도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솔직이 고백하자면, 나는 <독일 신학>에 대한 
그같은 찬탄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나도 그 책에서 여러 가지 자극을 받긴 했지요.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책에는 인간적인 면, 시적인 요소,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따뜻한 감정과 경외감이 결여되어 있어요.
십 사 세기의 모든 신비주의는 준비 단계로선 유익한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루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결국 신의 축복과 신이 부여한 용기를 갖고 
현실 생활로 귀환하는 데서 비로소 그 해결점을 찾았지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의 무상함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자기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기의 존재, 출생, 영생은 불가사의한 
초지상적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깨달아야만해요.
이것이 곧 신에게 귀의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비록 지상에서는 끝내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신에게로의 향수를 남겨 주지요.
그렇지만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이 창조된 세계를 지양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인간 자신이 무에서 만들어졌지만, 
즉 오로지 신에 의해 신으로부터 나오긴 했지만, 
그는 혼자 자기 힘으로 그 무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타울러가 말하는 자아소멸 이라는 것도, 
불교도들의 경우에서의 열반, 또는 영혼의 입적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타울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고의 존쟁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이 큰 나머지
공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자존 앞에서 
기꺼이 아무리 깊은 나락으로라도 떨어질 의지를 갖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같은 피조물의 소멸은 창조자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은 그것을 창조했으니까요.   
<신이 모습을 바꾸어 인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지, 
인간이 신으로 화할 수는 없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인간 영혼을 단련시키는 일종의 불은 되겠지만, 
인간의 영혼을 가마솥의 끓는 물처럼 증발시키지는 못합니다.
자아의 허무를 인식한 자는 그 자아가 곧 
진정한 신성의 반영이라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