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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 침 묵3

Joyfule 2010. 4. 1. 08:00
 
 무라카미 하루키 : 침  묵3  
어느날 나는 학기말 영어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시험에 서 일등을 하다니 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그런 점수를 받은 것은 아니었죠. 
그때 아주 갖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지만-
만약 시험에서 한 과목이라도 일등을 하면 사주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영어에서 일등을 하자 마음먹고 철저하게 공부를 했던 것입니다. 
시험 범위를 샅샅이 훑었습니다. 
틈만 나면 동사 활용을 외웠습니다. 
교과서 한권을 통째로 암기할 만큼 수도 없이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백점에 가까운 성적으로 일등이 됐다 해서 
신기할 것도 이상할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선생도 놀란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아오키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오키는 영어 시험에서는 줄곧 일등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죠. 
선생님은 답안 지를 돌려주면서 농담 비슷하게 아오키를 놀렸습니다. 
아오키의 얼굴이 뻘게졌죠. 자기가 웃음거리가 된 기분이었겠죠.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며칠후 누군가 나에게 아오키가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커닝을 했다는것 이었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는 내가 일등을 할 턱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 비슷한 이야기를 몇몇 친구들한테도 들었습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상당히 화가 났습니다. 
그런 소문 따위 웃음으로 묵살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나 겨우 중학생입니다. 
그렇게까지 냉정해지기는 어려웠죠. 
그래서 나는 어느날 점심 시간에 아오키를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떻게된 일이냐고 추궁했습니다. 
아오키는 시치미를 떼더군요. 
야 너, 생트집 잡지마. 라고 하더군요.
너한테 이러 니저러니 말 들을 이유 없다구, 
어쩌다 일등 한번 했다고 까불기는. 그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가볍게 툭치듯 물리치고는 저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필경 나보다 자기가 키도 크고 체력도 좋고 힘도 셀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내가 반사적으로 아오키를 때린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정신이 들었을때. 
나는 아오키의 왼쪽 뺨에 힘껏 스트레이트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아오키가 옆으로 픽 쓰러지고, 쓰러지는 바람에 벽에 머리가 부딪쳤습니다.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코피가 터져 하얀 셔츠 앞으로 끈적끈적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은채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내 주먹이 그의 턱뼈를 스치는 순간부터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런 짓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 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지만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오키에게 사과할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아오키만 아니었어도 
나는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오키라는 녀석한테만은 도무지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오키를 때린 일은 후회하고 있었지만, 
아오키에게 나쁜짓을 했다고는 털끝만큼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런 녀석은 얻어맞아도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놈은 해충 같은 인간이다. 
이런 놈은 누군가 발로 짓뭉개버려도 아무 상관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때려서는 안되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인 진리였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나는 이미 상대방을 때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는 아오키를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아오키는 오후 수업에 빠졌습니다. 
아마 그 길로 집에 돌아갔나보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찜찜한 기분이 내 안에서 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들어도 책을 읽어도 조금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위 속에 묵직한 것이 똬리를 틀고 있어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벌레를 삼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 참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를 이렇게 암담한 기분에 빠지게 한 아오키라는 남자를 
한층 더 격렬하게 증오하였습니다." 
"아오키는 이튿날 부터 나를 무시하려 애썼습니다. 
마치 나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조차 않는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보면 변함없이 일등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 이후 시험 공부에 두번 다시 정열을 쏟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험 점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래서 낙제를 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공부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숙부의 체육관에도 죽 다녔습니다. 열심히 훈련에 정진했습니다. 
덕분에 내 복싱 솜씨는 중학생치고는 꽤 상당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몸이 점점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깨가 넓어지고 팔이 탄탄 해지고 얼굴 살에도 탄력이 생겼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어른이 돼가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멋진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 알몸으로 목욕탕 커다란 거울 앞에 섰습니다. 
그 무렵에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