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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 침 묵1.

Joyfule 2010. 3. 30. 09:11
 
 무라카미 하루키 : 침  묵1  
1) 나는 오사와 씨에게 지금까지 싸우다 누군가를 친 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았다. 
오사와 씨는 눈부신 무엇이라도 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거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 눈초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의 그 답지 않았다. 
거기에는 번뜩 빛을 발하는 어떤 섬뜩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순간적이었다. 
그는 그 빛을 금방 안으로 숨기고 예전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딱히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이렇다 할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어쩌면 불필요할 질문을- 하게 한 것이다. 
그 후 나는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오사와 씨는 내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빠져 있는듯하였다. 
무언가를 견디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헤매고 있는 듯하기도 하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창 밖에 나란한 은색 제트 여객기를 바라보았다. 
애당초 내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한 동기는 그가 중학교 때부터 줄곧 
체육관에 다니면서 복싱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이런저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온것이다. 
그는 서른 한 살인데 지금도 여전히 한 주에 한 번은 체육관에 가서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대학 시절에는 몇 번이나 대표 선수로 시합에 나갔다. 
전국체전 선수로 발탁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좀 의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일을 함께 하였지만 오사와 씨가 20년 가까이나 
복싱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분하고 주제넘게 나서거나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성실하고 참을성 있게 일했고,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 한번 하지않았다. 
아무리 바쁠 때라도 언성을 높이거나 눈썹을 치켜 뜨지 않았다. 
타인의 험담을 늘어놓거나 투덜투덜 불평을 해대는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를 표현하자면,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인간형이었다. 
풍모도 온화하고 느긋하여 공격적인 성품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그런 인물과 복싱이 어떤 지점에서 연결될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하고만 것이다, 
우리는 공항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사와 씨와 나는 함께 니가타로 떠날 예정이었다. 
계절은 12월 초순.공항은 뚜껑이라도 덮은 것처럼 어둠침침하게 구름져 있었다. 
니가타에는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행기는 출발 예정시간보다 꽤 늦어질듯하였다. 
공항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라우드 스피커에서는 각 항공편의 지연을 알리는 아나운스가 흐르고 있었고, 
발이 묶인 사람들은 지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레스토랑은 난방이 지나쳐 나는 줄곧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야만 했다. 
"기본적으로는 한 번도 없습니다" 
오사와 씨는 한참이나 침묵한 후 불쑥 그렇게 말을 뱉었다. 
"나는 복싱을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사람을 때린 적이 없습니다. 
복싱을 시작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요. 
글러브를 끼지 않고 링 밖에서 사람을 때려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보통 사람이라도 잘못 때리면 장소에 따라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싱을 하는 인간이 주먹을 휘두른다면 
그건 흉기를 사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가 되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딱 한번 사람을 때린 적이 있습니다."라고 오사와 씨는 말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그때 나는 본격적인 기술 같은것은 
아직 하나도 배우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당시 내가 체육관에서 연습한 것은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한 기본 메뉴뿐이었어요. 
줄넘기나 스트레칭, 런닝, 온통 그런 것들뿐이었죠. 
더구나 때리려고 마음먹고 때린 것도 아니 었습니다. 
다만 나는 그때 너무 화가나서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었습니다. 
자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대방에게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화가 사그라들지 않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오사와 씨는 숙부가 복싱 체육관을 경영하는 관계로 복싱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동네 어귀에 적당히 자리잡고 있는 엉터리 체육관이 아니라, 
동양 챔피언도 배출한 적이 있는 체계적인 일류 체육관이었다. 
오사와 씨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그 체육관에 다니면서 
체력을 좀 단련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들은 아들이 항상 방에 처박혀 책만 읽고 있는것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오사와 씨는 복싱을 배운다는 것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숙부는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뭐 좀 해보는 것도 괜찮겠지, 
정 싫으면 그때 가서 그만두어도 될테고 싶은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숙부의 체육관으로 몇달 다니는 사이에 
그는 그 경기에 뜻 밖일 정도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복싱에 매력을 느낀 가장 큰 이유는 복싱이 기본적으로 과묵한 스포츠고 
또 아주 개인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적도 접한 적도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그 세계는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의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 냄새와 가죽 글러브가 
서로 스치는 팽팽한 소리와 근육을 효율적이고 민첩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몰두하는 과묵한 모습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사로잡아갔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체육관에 다니는 일이 그에게 많지 않은 즐거움의 하나가 되었다. 
"복싱이 마음에든 까닭은,그 운동에 깊이가 있어서였습니다. 
그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때리고 맞고 하는 따위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런것은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아요. 
사람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다면 설사 졌다해도 상처 입지 않아요. 
사람은 모든 것에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복싱이란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는 말인데- 그런 행위였습니다. 
글러브를 끼고 링에 서있다 보면, 때로 자신이 깊은 구멍 속에 있는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주 아주 깊은 구멍이에요.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죠. 
그 속에서 나는 어둠을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하죠.그렇지만 슬프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