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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8

Joyfule 2010. 1. 16. 09:07

 

    사씨남정기 - 김만중.8  


 

유한림은 전에 교씨가 사부인의 투기를 은연중에 비방하였을 때에도

믿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이런 일까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당초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사부인의 주선으로

교씨를 첩으로 맞아들였더니 지금 와서는 자기도 자식을 낳게 되자

악독한 계교로 교씨 소생을 방예로 저주하여 없애려고 한다고 부인 대접에 냉담하게 되었다.

 

이때 사급사 댁에서 부인의 병환이 위중하므로

딸을 보고자 사돈 유한림 댁으로 편지를 내었다.

사부인이 모친의 위독한 기별을 받고 깜짝 놀라서 유한림에게,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시다 합니다.

지금 가뵙지 못하면 평생의 한이 되겠으니 친정에 보내주십시오."
"장모님 병환이 위독하시면 빨리 가시오. 나도 틈을 타서 한번 가서 문안하겠소."
사부인이 친정길을 떠날 때 교씨를 불러서 자기 없는 사이의 가사를 부탁하고

인아를 데리고 신성현 친정으로 갔다.

모녀가 오래 떠나 있다가 병석에서 딸을 만나니 모녀가 일희일비하였다.

모친의 노환은 중하였으나 일진일퇴의 증세이므로

사부인은 구호하느라고 빨리 시가로 돌아오지 못하고 자연 수개월이 흘렀다.

 

유한림의 벼슬은 본디 한가한 직책이라

때때로 틈을 타서 빙모 문병차 신성현 처가로 왕래하였다.

이 무렵에 산동과 산서와 하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거산하여 사방으로 유랑하게 되었다.

황제가 이 지방의 기황을 들으시고 크게 근심하여

조정에서 덕망 있는 신하 세 사람을 뽑아서 삼도로 나누어 보내어

백성의 질고를 살피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때 유한림이 세 신하의 한 사람에 뽑혀서 급히 산동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으므로

미처 사부인을 보지 못하고 떠났다.


유한림이 집을 떠난 뒤로는 교씨가 더욱 마음을 놓고

방자하게 동청과의 간통을 마치 부부같이 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하루는 교씨가 동청에게,
"지금 한림이 멀리 지방을 순모하고 있으며 사씨가 오래 집을 떠나서 없으니

계교를 단행할 가장 좋은 시기인데 장차 사씨를 없애 버릴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간부의 꾀를 물었다.
"묘계가 있소. 사씨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으니 걱정할 것 없소."
하고 그 묘안을 귓속말로 설명하자 교씨가 반색하였다.
"낭군의 그 방법이면 귀신도 모를 테니 곧 착수해 주소."
"내게 냉진이란 심복이 있는데 내 말이라면 잘 듣고 꾀가 많으니 감쪽같이 해치울 것이오.

우선 사씨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얻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어렵군요."
교씨가 한참 생각한 끝에 자신이 있는 듯이 말하였다.
"옳지 좋은 수가 있어요.

사씨의 시비 설매가 우리 납매의 동생이니까

그 애를 달래서 사씨의 보물을 훔쳐 내게 하겠어요."


이런 음모를 한 뒤에 납매가 조용한 틈을 타서

사씨의 시비 설매를 불러서 금은과 보물을 주면서 꼬여 대었다.

이에 귀가 솔깃해서 넘어간 설매가,
"부인의 패물을 넣은 상자는 골방에 간수해 있으나 열쇠가 있어야지.

그런데 그 보물을 무엇에 쓰시려고 그러지?"
"그것은 묻지 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만일 이 일이 탄로나면 우리 둘은 살지 못할 거야."
납매는 그런 위협까지 하고 교씨의 열쇠꾸러미를 주면서

그 중에서 맞는 열쇠가 있을 테니 잘 해보라고 하며

보물 가운데서도 유한림도 늘 보고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꺼내 오라고 부탁하였다.

설매가 열쇠꾸러미를 숨겨 가지고 가서 골방에 간수해 둔

보석상자를 열고 옥지환을 훔쳐다가 교씨에게 주면서 그 옥지환의 내력을 고하였다.
"이 옥지환은 구가(舊家)의 세전지보물이라고 한림 양주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교씨가 기뻐하며 설매에게 후한 상금을 주고 동청과 함께 흉계를 시행시키기로 하였다.

 

마침 이때에 사씨를 모시고 갔던 하인이 신성현 친가에서 와서

사급사 부인이 작고했다는 부고를 전해왔다.
"사씨 댁에 무후(無後)하시고 다음에 가까운 친척도 없어서

우리 부인께서 손수 치상(治喪)하여 장례를 지내시고

교낭자께 가사를 착실히 살피시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이 부고를 받은 교씨는 간사스럽게 시비 납매를 보내서

극진히 사부인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동청을 재촉하여 흉계를 진행시켰다.
이때 유한림이 산동 지방에 이르러서 주점에 들러서

밥을 사먹으려 할 적에 문득 어떤 청년이 들어와서 유한림에게 읍하였다.

유한림이 답례하고 본즉 그 청년의 풍채가 매우 준매하였다.

유한림이 성명을 묻자,
"소생은 남방 태생으로 성명은 냉진이라 하옵는데

선생의 고성대명(高聲大名)을 듣고자 하옵니다."
그러나 유한림은 민정시찰로 암행중이므로 바른대로 밝히지 않고

다른 성명으로 대답하고 민간의 곤궁한 실정을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의 대답이 영리하고 선명하였으므로 유한림이 감탄하고 계속 물었다.
"그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그대가 비록 남방 사람이라 하나 서울 말을 하는군."
"저는 외로운 몸으로서 구름같이 동서로 표박하며 정처가 없는 사람입니다.

서울에도 수년간 있다가 올 봄에 이곳 신성현에 와서 반 년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다행히 함께 수일 동안

동행하게 됨은 좋은 인연이 될까 합니다."


"그런가? 나도 외로운 길에서 마음이 울적한 참이니 자네를 만나서 다행일세."
하고 주식을 권하니 서로 먹고 동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낮에는 길을 가고 해가 지면 주막에서 자고

닭이 울어서 밤이 새면 또 떠나가고 하였다.

유한림이 밤에 잘 때에 보니 그 청년의 속 옷고름에 본 적이 있는 듯한 옥지환이 매여 있었다.

유한림이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본즉 아무래도 눈에 익은 옥지환이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