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사씨남정기 - 김만중.15

Joyfule 2010. 1. 24. 23:23

 

 

     사씨남정기 - 김만중.15  

 

 

사씨 부인이 시부님 묘전으로 가서 하직 배례를 하고

유모와 시비와 노복 세 사람을 데리고 배에 올라 일로 남방으로 향하여 먼 길을 떠났다.

사씨가 배를 타고 떠난 직후에 냉진이 강도 수십 명을 데리고

유씨 산소 밑에 있는 사씨의 집을 밤중에 습격하였으나

텅빈 집에 주종의 인적은 묘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냉진이 놀라서 어이가 없는 듯이,
"사씨는 과연 꾀가 많은 여자다. 우리의 계교를 벌써 알아채고 달아났구나."
하고 도리어 탄복하고 돌아와서 또 실패한 경과를 동청에게 보고하였다.

 

동청과 교씨는 사씨를 잡지 못하고 놓친 것을 분하게 여겼다.
이때 사씨 부인은 배를 타고 남방으로 향하여 갈 제

만경창파에 바람이 일어서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이 거칠어서

배를 나뭇잎처럼 희롱하였다.

이렇게 위험해진 풍랑 속을 가던 장삿배들은

새벽달 찬바람에 한사코 닻 감는 소리는 물 깊이를 짐작시켰고,

양자강 양안의 산협에서는 원숭이떼가 우는 슬픈 소리가

조난한 선객들의 마음을 더욱 산란케 하였다.

이런 조난선 가운데서 사씨는 자기의 불행만 계속되는 신세를 한탄하여 마지 않았다.

규중 열녀의 몸으로 더러운 죄명을 쓰고 시집을 쫓겨난 사람이 되었다가

박해를 피하여 장사로 도망치다가 이제 만경황파의 일엽편주에 운명을 맡겼으니

오장이 뒤집히고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였다.
사씨는 마침내 통곡하고 하늘에 호소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런 인생을 내시고 명도의 기구함을 이처럼 점지하셨습니까?"
유모도 따라서 슬프게 울다가 먼저 울음을 그치고,
"하늘이 높으시나 살피심이 밝으시니 부인의 앞길도 멀지 않아서 트일 것입니다."
"내 팔자가 기박하여 너희들까지 고생을 시키니 마음이 아프다.

나는 내 죄로 당하는 고생이지만 유모와 차환은 무슨 죄랴.

이것은 나 같은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니 내가 어찌 민망하지 않으랴.

규중 여자의 몸으로 일엽편주로 이 풍랑이 심한 물 위에 표류하니 장차 어찌될 신세랴.

두부인이 이런 사정을 알고 기다리시는 바도 아닌데

시집을 쫓겨난 사람이 구차하게 살아서 장사로 구원을 바라고 가니

이 신세가 어찌 가련하지 않으랴.

차라리 이 물 속에 몸을 던져서 굴삼려의 충혼을 따를까 한다."


이처럼 주종이 서로 울고 서로 위로하면서 표류하던 배가

어느 곳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더욱 심해지고

사씨의 토사병이 급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자

배를 뭍에 대고 어떤 집에 들러서 병을 치료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 집의 여자가 매우 양순하여 사씨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였으므로

사씨가 감격하고 그 여자의 나이를 물었더니 이십 세라는 처녀의 대답이었다.

사씨 부인은 그 여자의 용모가 곱고 마음의 의기가 장함을 사랑하는 동시에

병으로 고생하는 과객에 대한 지성을 고마워하면서 친형제같이 수일 동안을 지냈다.

그 집 처녀의 덕택으로 병이 나아서 이별할 적에는

주객의 정의가 헤어짐을 여간 슬퍼하지 않았다.

사씨는 주인 여자에게 사례하려고 손에 끼었던 가락지를 주면서 치하하였다.
"이것이 비록 미미하지만 그대 손에 끼고서

나의 마음으로 보내는 정을 잊지 말아요."
"이 패물은 부인이 먼 길을 가시는데

노비가 떨어졌을 때도 긴요하실 터인데 제가 어찌 받겠습니까?"
"여기서는 이미 장사가 멀지 않고

그곳에 가면 비용도 별로 들 것 같지 않으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 두오."
사씨가 굳이 주었으므로 그 여자는 감사하게 받고 이별을 안타까워하였다.

사씨 부인도 그 여자와 이별하기를 슬퍼하면서 그 집을 떠났다.

 

수일 후에는 노복이 노독과 풍토병에 걸려 마침내 객사하고 말았다.

사씨 부인은 충성스럽던 노복의 죽음을 슬퍼하고

배를 머물게 한 뒤에 그의 시체를 남향 언덕에 정성껏 안장하고 떠났다.

그러나 거기서 얼마 가는 동안에 또다시 폭풍이 일어서

파도가 집동같이 솟아서 배를 덮어 버리려고 몰려들었으므로

배는 위험을 피해서 동정호의 위수를 따라서 악양루에 이르렀다.
이곳은 옛날 열국시대의 초나라 지경이었다.

우의 순 임금이 순행하시다가 창호 땅에서 붕거하시자

아황과 여영의 두 왕후가 순 임금을 찾지 못하고 소상강에서 슬피 울었을 때

그 피로 화한 눈물을 대숲에 뿌린 것이 대나무에 점점의 얼룩이 졌다는데

그것이 유명한 소상반죽(瀟湘班竹)이 되었다는 전설을 남겼던 것이다.

그 후에 나라의 신하 굴원이 충성을 다하여 왕을 섬기다가

간신의 참소를 받고 강남으로 축출되자

이곳에 와서 수간 모옥을 짓고 지내다가 강물에 몸을 던져 버렸으며

또 한나라의 가의(賈誼)는 낙양재사(洛陽才士)였으나

당의 권신에게 쫓겨서 장사에 와서 제문을 강물에 던져서

여기서 억울하게 빠져 죽은 굴원의 충혼을 조문한 고적으로서

옛날부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심회를 비창하게 감동시켰다.


그러므로 그 슬픈 전설에 흐린 구름이 항상 구의산에 끼고

소상강에 밤이 오고 동정호에 달이 밝고 황릉묘에 두견새가 울 때는

비록 슬프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저절로 눈물이 흐르고

탄식하게 되었으므로 천고의 의기가 서린 영지였다.

슬프도다.

사씨는 대가집 주부로서 무거운 짐을 지고 정성을 다하여 장부를 섬기다가

음부 교씨의 참소를 입고 일조에 몸이 표령하여 이곳에 이르러서

옛날의 충의 인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으랴.


악양루 밑에서 배를 내린 사씨 부인은 밤이 새도록 강가에 머문 배에서 기다리다가

날이 밝은 후에야 비로소 인가를 발견하고 유모와 시비를 거느리고 배에서 내렸다.

뱃사람들은 갈길이 바쁘기 때문에

사씨에게 몸조심하라는 당부와 슬픈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