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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6

Joyfule 2010. 1. 25. 23:13

 

    사씨남정기 - 김만중.16 

 


이처럼 사씨는 천신만고 뱃길을 얻어서 장사에 거의 다 왔다가

풍랑에 밀려서 이곳에 와서 배에서도 내렸으므로 앞길이 다시 막혔으니

창자가 촌절할 듯 아무리 생각하여도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유모가 울면서 호소하였다.


"사고무친한 이 땅에 와서 또다시 앞길이 막혔으므로

부인은 장차 어떻게 귀하신 몸을 보전하려 하십니까?"
"인생이 세상에 나면 수요장단(壽夭長短)과

화복길흉이 천정(天定)한 운수임에 일시의 액운을 굳이 근심할 바 아니지만

이제 내 신세를 생각하니 자취기화(自取其禍)라 할 수밖에 없다.

옛말에도 하늘이 지은 화는 면할 수 있어도 스스로 지은 화에선 살아나지 못한다 하였는데

내가 지금 중도에 이르러서 이같이 낭패하니 다시 어디로 가며 누구를 의지하랴."
하면서 자탄하였다.

이때 유모가 도리어 사씨 부인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영웅호걸과 열녀절부들도 이런 곤액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부인에게 지금 일지의 액화가 있으나 그 억울함은 명천(明天)이 조람하시고

신명이 재방하여 청풍이 흑운을 쓸어 버리면 일월을 다시 보실 것이니

부인은 너무 낙심 마십시오.

어찌 일시의 액운에 지쳐서 천금 같은 몸을 돌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나 사씨 부인은 여전히 힘을 잃고 탄식만 하였다.

 

"옛날 사람들도 액운을 겪은 이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자연 구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몸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지금 내 처지는 그렇지 못하여 연연약질이

위로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아래로 땅에 용납되지 못하니 어찌하랴.

구차하게 된 인생을 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죽어서 옛날 사람처럼 꽃다운 이름을 나타내자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강물이 맑아서 깊이가 천만장이니 마땅히 나의 한낱 뜻과 뼈를 감출 것이다."
하고 강물을 향하여 뛰어들려고 하였다.

유모가 놀라서 사씨의 몸을 부여잡고 울면서 애원하였다.
"저희들이 천신만고하여 부인을 모시고 이곳에 이르렀으매,

부인이 만일 죽으시려면 저희들도 함께 죽어서 지하에서도 모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안 된다. 나는 죄인이니까 죽어도 마땅하지만

너희들은 무슨 죄로 나를 따라 죽는다는 말이냐.

도중에서 노자 다 떨어졌으니 너희들은 인가에 의탁하여 일을 해주고

몸조심을 하다가 북방 사람을 만나거든

내가 이곳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고향으로 전해라."
하고 신신당부한 뒤에 거기 선 나무의 껍질을 깎고

큰 글씨로 모년 모월 모일 사씨 정옥은 시가에서 쫓긴 몸 되어

이곳에 이르렀다가 진퇴무로하여 몸을 이 강물에 던졌다고 썼다.

이 유서를 쓴 사씨는 붓을 놓고 통곡하였다.

유모와 시녀가 좌우에서 사씨를 붙잡고 슬피 울매

일월이 빛을 잃고 초목이 시들어서 슬픈 듯하였다.

어느덧 날이 어둡고 달이 떠서 달빛이 강 위에 처량하게 비치매

사면에서 물귀신이 울어대고 황릉묘에서 두견새가 처량하고, 소상강 대밭에서도

귀신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서 악기(惡氣)가 사람을 침노하였다.


"밤기운이 몹시 차가우니 저 악양루에 올라서서

밤을 지내고 내일 다시 앞일을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유모가 부인에게 권하자 부인이 유모의 말에 따라서 악양루로 올라갔다.

조각으로 된 들보가 하늘에 높이 솟아서 소상강 물에 임하였는데

오색 구름이 구의산에서 피어 와서 악양루를 둘러싸고 달빛이 난간에 은은히 비치매

시인 묵객이 읊어 쓴 글귀의 현판이 벽에 무수히 걸려 있었다.

사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길이 탄식하면서,
"이 악양루는 강호의 유명한 곳이지만

영웅호걸과 절부열녀들이 이렇게 많이 이곳에 인연을 맺었을 줄 알았으랴.

내 비록 표박중이나 이곳에 온 것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고 노주 세 사람이 그날 밤을 누상에서 지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에 누 밑에서 소란한 사람의 소리가 나며

수십 명이 누상을 향하여 올라왔다.

그들은 서울 사람들로서 이곳에 왔다가

악양루의 해 뜨는 경치를 구경하려고 일찍 올라온 일행이었다.

사씨 부인은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났으므로

유모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 강변 숲으로 와서 말하였다.
"날이 밝았으나 노자가 없고 우리들이 의탁할 곳이 없으니 장차 어디로 가랴.

아무리 생각하여도 강물 속으로 몸을 감추는 수밖에 없다."
하고 사씨 부인이 또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유모와 시비가 망극하여 통곡하였다.

 

사씨는 어제 종일과 종야를 굶주리고 잠을 자지 못하여

지칠 대로 지쳤으므로 잠시 유모의 무릎에 기댄 채 깜박 졸았다.

그때 비몽사몽간에 한 소녀가 와서,
"저의 낭랑께서 부인을 모셔오라는 분부로 왔습니다."
하고 어디로인지 인도하여 가고자 하였다.
"너의 낭랑이 누구시냐?"
"저와 함께 가시면 아실 것입니다."
사씨 부인이 그 소녀를 따라서 어떤 곳에 이르니

고대광실의 전각이 강가에 즐비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녀가 사씨 부인을 인도하여 그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을 몇 개나 지나서 들어가자

큰 대궐 위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내렸다.

사씨가 전상으로 올라가서 보니 좌우에 두 분의 낭랑이 황금교의에 앉았고

그 좌우에 고귀한 여러 부인들이 모시고 있었다.
사씨 부인이 예를 마치자 낭랑이 자리를 권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순 임금의 두 비다.

옥황상제께서 우리의 정사를 측은히 여기시고 이곳의 신령으로 삼으신 고로

여기서 고금의 절부열녀를 보살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한때의 화를 만나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정한 운명이다.

그대가 아무리 죽으려 하여도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허락할 수 없으니 마음을 진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