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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7

Joyfule 2010. 1. 27. 09:33

 

 

 

     사씨남정기 - 김만중.17  

 

 

사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례하고 낭랑의 덕을 치하하였다.
"인간계의 미천한 여자로서 항상 책을 통하여 성덕열절을 우러러 사모할 따름이옵더니

이제 여기와서 양배하올 줄 어찌 뜻하였겠나이까?"
"그대를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대가 천금 중신을 헛되게 버려서

굴원의 뒤를 따르려 하니 이는 천도가 아니니라.

그대의 호천 통곡은 천도가 무심함을 한함이니

이는 평일의 총명이 옹폐함이요, 그대의 액운이 비상한 탓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의논하고 오래 쌓인 회포를 듣고 위로해 주고자 한 것이다."


"상랑의 분부가 이러하오니 미첩이 품은 소회를 아뢰겠나이다.

저는 본디 한미한 사람입니다.

일찍 엄부를 잃고 자모 슬하에 자랐으매 배운 바가 없어서 행실이 불미하던 중에

시부가 별세한 뒤에 크게 변하여 남산의 대[竹]를 베고 동해의 물을 기우려도

그 죄를 씻지 못할 누명을 쓰고 낯을 가리고 시가의 문을 하직하고 나왔습니다.

그 후에 눈물을 뿌려 시부의 묘하에 하직하고 강호를 유랑하다가

몸이 소상강에 이르러 진퇴궁전하여 앙천 장탄하였으나 하는 수 없어서

천장수심(千丈水深)에 임하니 한 터럭 같은 일신을

어복(魚腹)에 장사지낼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녀자의 마음이 망령되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호천통곡하여 낭랑께서 들으시게 됨에 심려를 끼쳤사오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천정한 바로서 인력이 아닌데

그대가 어찌 굴원의 뒤를 따르며 하늘을 원망하겠느냐?

하늘이 이미 나라를 멸망시키고 원한을 시원케 하시니

임금이 죄를 다스리고 충신의 이름이 나타나서 천백 세에 유전된 것이다.

그 옛일을 비겨서 보면 처음에는 곤액하나

장래에는 복록이 무량함이니 어찌 그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결하겠느냐?

우리 형제(아황과 여영)는 규중약녀로서 배운 바 없으되

시가를 조심하여 섬김을 옥황상제가 가엾게 여기시고

기특히 여기셔서 이 땅의 신령으로 봉하여 그윽한 음혼을 다스리게 하였으매

이 좌상의 여러 부인은 모두 현부열녀이므로

이따금 풍운의 힘을 빌려 이곳에 모여 서로 위로하매, 세상의 영욕이 어찌 문제가 되랴.

유가는 본디 적선지문(積善之門)인데 오직 유한림이 조달하여 천하사를 통하나

골격이 너무 징청한 고로 하늘이 재앙을 내리사 크게 경계코자

잠깐 이리하다가 좋은 때가 오면 다시 재앙을 없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그것을 모르고 조급히 구느냐.

그대를 참소하는 자는 아직 득의하여 방자교만하지만

그것은 마치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 줄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어찌 더러운 것과 곡직을 다루겠느냐?

하늘이 장차 대벌을 내리셔서 보응이 명백해질 것이다."


"어리석은 저를 이처럼 위로하시고 격려하여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그대 온 지가 벌써 오래 되었으니 내 말을 알았거든 빨리 돌아가라."
"제 허물을 낭랑께서 더럽다 하시지 않으시고

목숨을 구해 주시려 하오나 돌아가도 의탁할 곳이 없으매

속절없이 강물에 몸을 감추겠사오니, 낭랑께서는 저의 정상을 살피고

이 말재(末才)를 시녀로 삼아서 이곳에 참례케 하여 주십시오."
하고 사씨 부인이 다시 애원하였다.

낭랑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그대도 나중에는 이곳에 머무르게 되려니와 아직 때가 마땅치 않으니 빨리 돌아가라.

남해도인이 그대와 인연이 있으니 그에게 잠깐 의탁함이 또한 천의(天意)로다."
"제가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남해는 하늘 끝이라 길이 요원하다는데

이제 노자 한 푼도 없이 어떻게 거기까지 가겠습니까?"
"연분이 있어서 자연 가게 될 것이니 그런 염려는 말고 어서 돌아가라."
하고 동벽 좌상에 용모가 미려하고 눈이 별같이 빛나는 자를 가리키면서

그는 위국부인이라 하고 또 한 사람을 가리켜서 반첩녀(潘妾女)라 하고

동한 때의 교대가와 양처사의 처 맹광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대가 이미 여기 왔으니 옛사람의 이름을 서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오늘 여기 와서 여러 부인의 면목을 뵈오니 뜻하지 않았던 영광이옵니다."
하고 두루 예하자 여러 부인들도 미소로 답례하였다.

사씨 부인이 하직하고 물러서려고 하자 낭랑이,
"매사를 힘써 하면 오십 후에 이곳에 자연 모이게 될 것이니

그때까지 세상에서 몸을 조심하라."
하고 청의동녀를 명하여 사씨를 모시고 가라 하므로 사씨가 전상에서 계하로 내리며

전상에서 열두 주렴 내리는 소리가 주르르 하고 맑게 울렸다.

그 소리에 놀라서 정신을 깨우치니 유모와 시녀가

사씨 부인이 오래 기절한 것을 망극히 여기다가 사씨의 소생을 반기며 구원하였다.

사씨가 몸을 움직여서 일어나서 얼마나 잤느냐고 물으니

기절한 뒤 서너 시나 되었다 하면서 소생한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부인께서 기절하셔서 저희들이 당황하여

백방으로 구완하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하고 그동안의 경위를 고하자 사씨도

낭랑을 만나보고 온 비몽사몽간에 본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고,
"아무래도 보통 꿈과는 다르니 내가 그곳으로 가던 길을 찾아가 보자."
하고 소상강 가의 대밭으로 들어가니

과연 한 묘당이 있고 현판에 황릉묘라고 써 있었다.

이것은 아황, 여영 두 비의 사당으로서 사부인의 꿈에 본 장소와 같으나

건물의 단청이 퇴색하고 황량하기 말이 아니었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서 전상을 바라보니

두 비의 화상이 꿈에 보던 용모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사씨가 분향하고 축원하는 말이,
"제가 낭랑의 가르치심을 입사와 타일의 길할 때를 기다리겠사오니

낭랑의 성덕을 믿고 잊지 않겠습니다."
축원을 마치고 사당을 물러나서 서편 언덕에 앉아

신세를 생각하고 여전히 슬픈 회포를 탄식하였다.

그리고 묘지기 집에 가서 밥을 얻어 오게 해서 세 사람이 모두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