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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8

Joyfule 2010. 1. 28. 08:00

 

 

 

     사씨남정기 - 김만중.18  

 

 

"우리 셋이 방황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나 이것은 신령께서 야속하게 희롱하심이다.

낭랑의 말씀대로 참는 데까지는 참아보자."
하고 탄식하는 동안에 해가 서산에 지고 달빛이 떠서 몽롱하게 주위를 비쳤다.

묘 안에 들어가서 사방을 살펴보니 밤은 깊어만 가고 짐승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사씨가 곰곰이 생각하되,
"사람이 세상에 나면 부귀빈천이 팔자소정이나 여자로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곳에 와서 의탁할 곳이 없으니

아무리 아황, 여영의 영혼의 위로하는 말씀이 있었으나

역시 죽어서 만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 또다시 죽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 홀연히 황릉묘의 묘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와서 물었다.
"부인이 또한 고초를 당하고 물에 빠지려고 하십니까?"
사씨 부인이 놀라서 바라보니 하나는 여승이요, 하나는 여동(女童)이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우리 일을 아는가?"
여승이 황망히 읍하고 합장하면서,
"소승은 동정호 군산사에 있는데 아까 비몽사몽간에 관음보살님이 나타나셔서

 '어진 사람이 환란을 만나서 갈 바를 모르고 강물에 빠지려고 하니

빨리 황릉묘로 가서 구하라' 하시므로 급히 배를 저어 왔는데

과연 부인을 만났으니 부처님 영험이 신기합니다."
"우리는 죽게 된 사람이라 존사의 구함을 받으니

실로 감격하나 존사의 암자가 멀고 가더라도 폐가 될까 합니다."
"출가한 사람은 본디 자비를 일삼는 처지이며

하물며 부처님의 지시로 모시려고 왔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하고 세 사람을 밖으로 인도하여 강가로 내려와서

배를 태우고 여동에게 노를 저어 가게 하자 순풍을 만나서 순식간에 군산사에 이르렀다.

 

이 섬의 산은 동정호 가운데 솟아 있으므로 사면이 다 물이요,

산은 푸른 대숲으로 덮여서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여승이 배에서 내려서 사씨를 부축이고 길을 찾아 갔으나

사씨의 기운이 파하였고 산길이 험해서 열 걸음에 한 번씩 쉬면서 암자에 이르렀다.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이 절은 매우 한적하고 정결하여 인세(人世)를 떠난 선경이었다.
사씨는 몸이 피곤해서 곧 잠이 들어 이튿날 아침까지 깨지 못하였다.

여승이 먼저 일어나서 불당을 소제하고 향을 피우며

경자를 치며 부인을 깨워 예불하라고 권하였다.

사씨가 유모들과 함께 불당에 올라 분향배례하고

눈을 들어 부처를 쳐다본 순간에 문득 놀라며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그 부처는 다른 불체가 아니라

사씨가 십육 년 전에 자기가 찬을 지어서 쓴 백의관음의 화상이었다.

 

그 화상에 쓴 찬의 자기 글씨를 보니 자연 놀라움과 슬픈 회포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양을 본 여승이 또한 깜짝 놀라서,
"부인의 말씀이 그러실진대 분명히 신성현 땅의 사급사 댁 소저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스님이 어찌 내 신분을 아십니까?"
"부인의 용모와 음성이 본 듯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소승 역시 그때 저 관음화상의 찬을 당시의 소저에게 받아간 우화암의 묘혜입니다.

소승이 유대감 댁의 명을 받고 부인에게 관음찬을 받아다가 보인즉

크게 칭찬하시고 아드님 유한림과 혼인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소승도 부인과 혼사를 보려고 하였으나

스승이 급히 부르셔서 산으로 돌아왔으므로 참례를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소승은 스승 밑에서 십 년을 수도하였으나 스승이 입적하신 후에

이곳에 와서 암자를 짓고 고요히 공부하면서 불상을 예배하고

부인이 쓴 글과 필적을 볼 적마다 부인의 옥설 같은 용모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어찌하여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씨 부인이 유한림의 부인이 된 이후의 전후사실을 자세히 들려주자

묘혜가 탄식하면서 사씨를 위로하였다.
"세상 일이 항상 이러한 법이니 부인은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부인이 감개무량해서 다시 관음불상을 우러러보니

외로운 섬 가운데 있는 한적한 절간에서 생기유동하여

완연히 살아 있는 듯하고 사씨가 소녀 시절에 지은 찬사가

또한 자기유락함을 그린 그 경지와 흡사하였다.
"세상만사가 모두 하늘이 정한 운수이매 인력으로 어찌하랴.

그러나 관음보살을 매일 분향하여 공양 기도하고 떼어놓고 온 어진 인아를 다시 만나야겠다."
고 축원하며 남자로 변복하였던 것을 여자옷으로 갈아입었다.
묘혜가 조용한 때 사씨 부인을 보고,
"부인이 이제 여기 와 계시나 왜 복색을 갈아입으십니까?"
"내가 자비로운 부처님과 스님의 보호를 받고

신변이 안전한데 어찌 어색한 변복으로 지내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 안전되신 것을 소승은 고맙게 여깁니다.

그런데 유한림은 현명한 군자이시니까

 한때 참언에 속더라도 멀지 않아서 일월같이 깨닫고 부인을 화거주륜으로 맞아 갈 것입니다.

소승이 일찍이 스승에게 수도하여 주(籌)도 약간 알고 있으니

부인의 사주를 보아드리겠습니다."
부인이 자기의 생년월일시를 말하자

묘혜는 한동안 침음하며 점을 친 뒤에 크게 기뻐하고 풀이를 하였다.
"부인의 팔자는 앞으로 대길합니다.

초년은 잠깐 재앙이 있으나 나중에는

부부와 모자가 다시 화락하여 복이 무궁하실 것입니다."
"아아, 그 말씀을 믿고는 싶으나 어찌 믿고 안심하겠습니까?

이 박명한 인생이 스님의 과장하신 복을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한담하는 동안에 도중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고 병도 나서

어떤 인가에 들러서 휴양한 이야기와 그때 어진 주인 여자의 은덕을 입은 일을 칭찬하였다.

그러자 묘혜가 그 말을 듣고,
"그 여자가 소승의 질녀였습니다."
하고 뜻밖의 말을 하였으므로 사씨가 의아해서 물었다.
"스님의 질녀라뇨?"
"이름이 취영이라 하지 않던가요.

제 어미가 그 애를 강보에 두고 죽고 제 아비가 변씨를 후처로 취했는데

그 후 아비가 또 죽으니까 계모 변씨가

취영이를 소승에게 맡겨서 삭발시키라 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 애의 관상을 보니 귀자(貴子)를 많이 두고

복록을 누릴 상이라 변씨에게 데리고 살도록 권하였는데

요사이 들으니 효성이 지극하여 모녀가 잘 산다더니

부인이 이번 도중에서 우연히 만나보셨습니다그려."
"역시 스님의 인연으로 그 질녀의 덕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나도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여 몸에 누명을 쓰고

쫓기는 사람이 되어서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