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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9

Joyfule 2010. 1. 29. 09:20

 

 

    사씨남정기 - 김만중.19  

 

 

"모두 하늘이 정하신 운수입니다.

부인과 소승이 잠시 인연이 있었으나 어찌 이런 곳에 계시겠습니까?"
사씨 부인이 묘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민망스러운 말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하겠습니까마는

집을 떠나 있으매 집에 남은 인아의 신세가 외로운 것이며

그 생사조차 모르고 또 근자에는 한림의 심정이 변한데다가

집안의 요인(夭人)이 있어서 나를 해치고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한림의 신상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던 중 내가 시부님 묘하에 있을 때

시부님 영혼이 현몽하셔서 일러주신 말씀이 육 년 사월 십오 일에

배를 백빈주에 대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그때 급화를 만날는지 모르겠습니다."


"유한림은 오복이 구전지상(具全之相)이요,

유문은 적덕지가이매 어찌 요화가 오래 침노하겠습니까?

그리고 백빈주의 급한 사람을 구하라 하신 말씀을 때를 어기지 말고 구하십시오.

유상공은 본디 고명하신 분이었으니까 영혼인들 어찌 범연하시겠습니까?"
사씨 부인도 묘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수월암에 머물러서 세월을 보냈으나

그냥 한가롭게 놀지 않고 바느질과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절의 신세를 보답하였으므로 묘혜도 기뻐하고 부인을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때 교씨가 본실의 지위로 정당에 거처하면서 가사를 총괄하매

간악이 날로 더하여 비복들도 교씨의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사씨의 인자한 대우를 그리워하며 슬퍼하였다.
교씨는 아래로는 비복을 학대하고 위로는 간악한 십랑과 공모하여

한림의 총명을 흐리게 하는 요물들을 집안에 끌여들여서 집안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교씨는 유한림이 조정에 입번할 때는 그 틈을 타서

동청을 백자당으로 청하여 음란한 추행으로 밤을 새웠다.

교씨가 그날밤에도 동청을 데리고 백자당에서 자고 날이 밝으매

동청은 외당으로 나가고 교녀는 수색으로 피곤하여 늦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유한림이 출번으로 집에 돌아와서 정당에 이르매, 교씨가 보이지 않았다.

시비에게 물으니 백자당에 있다는 대답이었다.

유한림이 곧 백자당으로 가서

아직도 전날 밤의 난잡한 몸매로 자고 있는 것을 보자 힐문하였다.
"왜 여기서 자는 거요?"
"요즘 정당에서 자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기운이 좋지 않아서 어젯밤에 여기서 잤습니다."
"그대 역시 그 방에서 자면 몽사가 흉하던가.

나도 잠만 들면 꿈자리가 번잡하여 정신이 혼침하고

입번으로 나가서 자면 편안해서 이상하더니

그대 역시 그렇다니 복술 잘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물어보는 것이 어떨까?"
교씨는 백자당으로 숨어서 동청과 간통한 사실을 유한림이 알아챌까 겁내던 차에,

유한림이 그런 말을 하므로 안심할 뿐 아니라

굿이라도 하라는 유한림의 뜻이라 좋은 기회라고 기뻐하였다.

 
이때 황제가 서원에서 기도를 일삼으며 미신에 빠져 있으므로

가의태우 서세가 상소하여 간하고 간신 엄승상을 논핵하자

황제가 대로하여 서세를 삭직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이에 대하여 유한림이 서세의 충성을 변호하고 그를 구하려고 상소하였으나

황제가 역시 질택하시고 신하에게 조서를 내려서,
"이후로 짐의 기도를 막는 자가 있으면 참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도관에 도진인(都眞人)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한림과 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도진인이 유한림을 문병차 방문해 왔다.

유한림이 사람을 다 보낸 뒤에 진인만 머무르게 하고 내실로 데리고 가서

이 방에서 자면 흉몽을 꾸게 되니 무슨 악귀의 장난이냐고 물었다.

진인이 방 안의 기운을 살피더니,
"비록 대단치 않으나 역시 기운이 좋지 않소이다."
하고 하인을 시켜서 벽을 뜯고 방예물의 목인(木人) 여러 개를 꺼내서 유한림에게 보였다.

유한림이 대경실색하자 진인이 껄껄 웃고,
"이것은 굳이 사람을 해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시첩이 유한림의 중총(重寵)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 소행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방예로 사람의 정신을 미란케 하는 계교니까

이것만 없애 버리면 다른 염려는 없습니다."
하고 그 목인들을 곧 불살라 버리라고 권하였다.
"유한림의 미간에 혹기가 가득 차 있고 집안의 기운이 또한 좋지 않습니다.

이때는 주인이 집을 떠나라고 술법에 나와 있으니 조심하여 제액(除厄)하십시오."
"삼가 명심하리다."
유한림이 괴이하게 여기고 진인에게 후사하여 보냈다.

유한림은 진인의 신기한 도술에 경탄한 뒤에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집안에 이런 일이 있으면 사씨를 의심하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사씨도 없고 방을 고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요물이 나왔으니 반드시 집안에 악사(惡事)를 꾸미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사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원래 이 일은 교씨가 십랑과 공모한 계교였는데

교녀가 동청과 백화당에서 동침한 사실을 숨기려고 창졸간에 꾸며댄 핑계인데

그 내실에서 자면 꿈자리가 나쁘다고 한 것이 도진인의 도술로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한림이 비록 교씨의 짓인 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신이 흐려졌으나

지금 비로소 전일의 총명이 다시 소생한 셈이었다.

유한림은 머리를 숙이고 과거 사오 년 동안 지낸 일을 곰곰이 반성하고

비로소 악몽을 깬 듯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이때 마침 장사로부터 고모 두부인의 편지가 왔다.

그런데 두부인은 아직도 사씨를 집에서 쫓아 내보낸 사실도 모르고

사씨의 일을 신신당부한 사연이 더욱 간절하게 유한림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고모께서 사씨를 축출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의아스럽다.

그리고 사씨가 결코 방탕하지 않으므로 옥지환 사건도 어떤 자의 농간이 아닌가.'
하고 새삼스럽게 의심하게 되었다.

눈치가 빠른 교씨는 유한림의 기색이 전과 달라진 것을 보고

그 기위가 늠름해진 유한림에게 감히 요괴로운 수단을 피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씨를 음해한 계교가

탄로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동청에게 상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