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사씨남정기 - 김만중.20

Joyfule 2010. 1. 30. 09:26

 

 

 

     사씨남정기 - 김만중.20  

 

 
"요즘 유한림의 기색을 보니 그전과는 아주 딴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 양인의 관계를 눈치챈 듯하니 어쩌면 좋겠어요?"
"우리 관계를 집안의 비복들이 모를 리 없으되

지금까지 유한림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부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지금 갑자기 기운을 잃고 약해지면 참소하는 자가 많을테니

 그렇게 되면 죽어도 묻힐 땅이 없을 것입니다."
"사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아요.

나는 여자라 좋은 궁리가 나지 않으니

당신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서 우리 두 사람의 화를 면하게 해주어요."
교씨가 간부 동청에게 매달려서 애원하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옛말에 남이 나를 해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해치라 하였으니

좋은 기회를 노려서 한림의 음식에 독약을 섞어서 먹여 죽이고 우리 둘이 백년해로합시다."
간악한 교씨도 이 끔찍한 계획에는 한참 동안 침울하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유한림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잡혀 죽으리라는 두려움에서,
"결국 그럴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면 큰일이니 둘이만 극비로 일을 진행시킵시다."

교씨와 동청이 이런 끔찍스러운 음모를 하는 줄도 모르고 유한림은

마음이 울적해서 친구를 찾아다니며 한담이나 하며 기분을 풀려고 하였다.

하루는 교씨와 동청이 유한림이 없는 틈을 타서 깊은 밤에 숨어서 은근히 정을 나누고

역시 유한림 해칠 계획을 상의하다가

동청이 책상 서랍에서 우연히 유한림이 쓴 글을 얻어 보게 되었다. 

 

동청이 그 글을 읽어 보다가 희색이 만면해지더니,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백년가우가 되게 해주실 테니 부인은 아무 걱정 말아요."
교씨가 의아하여 동청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그게 정말이오? 무슨 좋은 징조가 있나요?"
"요전에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서

짐의 기도 행사를 금하려고 간하는 자는 참하라 하여 계신데,

지금 다행히 한림이 쓴 이 글을 보니 엄승상을 간악소인에 비하여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가 되는 글을 갖다가 엄승상에게 보이면

 엄승상이 황제께 알려서 엄형에 처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양인은 마음 놓고 백 년을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이 좋아라!"
교녀가 반색을 하고 제 볼을 동청의 볼에 대고 문지르면서 음란한 교태를 부리며 시시덕거렸다.


"이번 계획이 공명정대한 나라의 위엄으로 처치하게 됐어요.

요전에 독살하려던 계획은 위험해서 걱정이더니 참 잘 됐어요.

역시 당신 말처럼 하늘이 우리 사랑을 도와 주신 거지요."
하고 음란한 행색이 더욱 해괴하였다.

동청은 교씨와 껴안고 뒹굴던 몸을 털고 일어서서

소매 속에 유한림의 글을 넣고 곧 엄승상 댁으로 가서 엄승상을 만났다.
"그대는 누군데 왜 왔는가?"
"저는 한림학사 유연수의 문객입니다마는

그 사람이 승상님과 나라에 반역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지 못하여 그 비행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엄승상은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한림의 약점을 알리러 왔다는 말에 귀가 번뜩 뜨였다.
"그래 그가 나를 어떻게 모해하던가?"
"그 사람의 의논을 들으면 항상 승상을 해치려고 하더니

어제는 술에 취해서 저에게 하는 말이 엄승상은 군부(君父)를 그르치는 놈이라고 욕하면서

모든 일을 송휘종(宋徽宗) 시절에 비하고, 황제께서 엄명을 내려서

간하는 상소는 못할지라도 글을 지어서 내 뜻을 풀리라 하고 이 글을 쓰기에,

글 뜻을 제가 물으니 승상을 옛날의 유명한 간신들에게 비유하였으며

짐짓 묘한 풍요(風謠)의 글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분격하고 이 글을 훔쳐서 승상께 드립니다."


하고 동청은 그럴 듯한 거짓말을 붙여서 참소하였다,
엄승상이 그 글 쓴 종이를 받아서 본즉 과연

천서와 옥배의 간악을 풍자해서 지은 글이 분명하였다.

엄승상이 잘 되었다는 듯이 냉소하고,
"흠, 유연수 부자만이 내게 항복하지 않고 음으로 양으로 나를 거역하더니

망령된 아이가 나라를 희롱하고 나를 원망하니 인제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하고 그 글을 가지고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찾아 만나고,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풀어져서 젊은 학자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심히 한심하옵니다.

이제 성상께서 법을 세워 계시매 감히 상소치 못하고

불출한 한림 유연수가 왕 흠약의 천서와 진원평의 옥배로 신을 욕하오니

신이야 무슨 욕을 먹어도 참을 수 있사오나 무엄하게도 성주를 기롱하오니

마땅히 국법을 밝혀서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까 하옵니다."
하고 국궁배례하고 유한림 필적의 글을 증거품으로 어전에 바치었다.

 

황제가 그 글을 받아서 보시고 대로하여

유연수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장차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이 소문에 놀란 태우 서세가 상소하였다.

그 전에 자기가 억울하게 엄승상에게 몰려서 귀양간 때에

유한림이 그를 구명하려고 상소하였다가 엄승상의 미움을 받던 결과라고 생각한 서세가,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유한림을 구하려는 정의감에서 올린 상서였다.
'성상께서 충신을 죽이려 하시는 그 죄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나

청컨대 그 글을 내리셔서 만조 백관에게 알리게 하오.'
황제가 서세의 상소문을 보시고,
"유연수가 천서와 옥배로써 짐을 기롱하니 어찌 사죄를 면하리오?"
이에 대하여 서세가 다시 아뢰되,
"이 글을 보오니 천서 옥배로 비유하여 성상을 기롱함이 분명치 않으며

한무제의 송인종(宋仁宗)은 태평지주라

유연수 죄를 입더라도 죽일 죄는 아닌데 어찌 밝게 살피지 않사옵니까?"
황제가 이 말에 침음하시자 좌우에서 간언이 일어날 기세를 보고

심중에 불평이 북받쳤으나 여러 조신의 이목을 가리우지 못하여 선심이나 쓰는 척하고,
"서학사의 말이 이러하오니 유연수를 감형하여 귀양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황제가 허락하시사, 엄승상은 유한림을 엄중히 경호하여

먼 북방의 행주 땅으로 귀양보내라고 유사에게 명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