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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22

Joyfule 2010. 2. 2. 09:56

 

    사씨남정기 - 김만중.22  

 

 

'진유현령 동청은 고두재배(叩頭再拜)하옵고 수상 좌하에 이 글을 올리나이다.

소생이 미한한 정성을 다하여 승상을 섬기고자 하되,

이 고을이 산박하며 재화가 없으므로 마음과 같지 못하오니

재정과 산물이 풍부한 남방의 수령을 시켜 주시면 더욱 정성을 다할 수 있을까 하옵니다.'
엄승상이 이 기회에 수단가인 동청을 아주 심복부하로 만들려고

곧 남방의 웅읍(雄邑)의 수령으로 영전시키려고 곧 황제에게 진언하였다.
"진유현령 동청이 재기과인하므로 큰 고을을 감당할 만하오니

성상께서 적소에 써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경이 보는 바가 그러하면 각별히 큰 고을의 수령으로 승진시켜서 그의 재능을 발휘하게 하라."
하고 곧 허락하셨다.

 

이때 마침 계림태수의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엄승상은 곧 동청을 금은보화가 많이 나는 고을로 영전시켰다.

그리하여 제 뜻대로 재물이 풍부한 계림의 태수가 된 동청은 교씨를 데리고 부임하여

더욱 탐관오리의 수완으로 백성의 고혈을 수찰하기에 분망하였다.
때마침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는 나라의 큰 경사가 있었으므로 유학사도 사은(赦恩)을 입었다.

그러나 곧 서울 본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척친이 있는 무창으로 향하였다.

여러 날 길을 가다가 장사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가 마침 여름의 염천이라, 더위로 여행이 어려웠다.

피곤한 몸의 땀을 식히려고 길가의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전후사를 생각하였다.

 '내 신령의 도움으로 삼 년 동안의 귀양살이에서도 심한 수토병도 면하였고,

또 천사(天赦)를 입어서 돌아가게 되었으니 북경의 처자를 데려다가 고향에 두고

생을 어옹(漁翁)이 되어 성대의 한가한 백성으로 지내면 얼마나 즐거우랴.'
하고 외로운 몸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북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인성이 들리더니 붉은 곤장을 든 관졸과

각색기치를 든 하인들이 쌍쌍이 오면서 길을 치우라고 호통을 하였다.

유한림이 무슨 어마어마한 행차인 줄 짐작하고 몸을 얼른 부근 숲속으로 숨기고 보니

한 고관이 금안백마 위에 높이 타고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지나고 있었다.

유한림이 그 말을 탄 사람을 자세히 본즉,

분명히 자기 집에서 집사로 일하던 그 간악한 동청이었다.
"아니 저놈이 어떻게 높은 벼슬을 하고 이 지방을 행차해갈까?"
의심하고 일행의 거동을 살펴보니, 그 기구가 자사(刺使)가 아니면 태수의 지위임이 분명하였다.
'아하, 저 간통스러운 놈이 천하의 세도가 엄승상에게 아부하여 저런 출세를 하였구나.'
하고 더욱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동청이 탄 백마가 지나간 뒤에 곧 이어서 길 치우라는 관졸의 호통이 들리더니

채의시녀 십여 명이 칠보금덩을 옹위하고 지나갔다.

그것이 동청의 처의 일행이라고 짐작한 유한림은 그 행렬이 다 지나간 뒤에

다시 큰길로 나와서 한참 가다가 주점에 들러서 점심을 사 먹었다.

이때 맞은편 집에서 여자 한 명이 나오다가

주점에서 점심을 먹는 유한림을 보고 놀라면서 물었다.
"유한림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와 계십니까?"
유한림도 놀라서 그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 여자가 다름 아닌 사씨의 시녀였던 설매였다.
"나는 이제 은사를 입고 귀양이 풀려서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마는

너는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 그래 그동안 댁내가 평안하냐?"
"대감님, 이리로 오세요."
설매는 황망히 유한림을 사람 없는 장소로 모시고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그동안 댁에서 겪은 일을 다 아뢰겠습니다.

한림께서는 아까 지나간 행차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동청이 무슨 벼슬을 하고 가는 모양이더라."
"뒤에 가던 가마 행차는 누구로 아셨습니까? 동해수를 기울여도 씻지 못할 원통한 일입니다."
"그야 필경 동청의 내자일 게 아니냐?"
"동태수의 그 내권이 바로 교낭자입니다.

소비도 일행을 따라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저 집에 들렀다가 뜻하지 않은 한림을 이렇게 뵈옵게 되었습니다."
유한림이 설매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한참 말을 못하다가 이윽고 설매에게 다시 물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좌우간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하라."
유한림이 비통한 안색으로 재촉하자, 설매가 흐느껴 울면서 호소하였다.
"소비는 하늘을 속이고 주인을 저버린 죄가 천지에 가득하오니

한림께서 관대히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 지난 일은 탓하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말하라."


"사씨 부인께서는 비복을 사랑하셨는데

불충한 소비가 우둔한 탓으로 교낭자의 시비 납매의 꼬임에 빠져서

사씨 부인의 옥지환을 훔쳐 내었으며 교낭자 소생 장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씨 부인에게 씌워서 축출케 하는 계교에 방조한 것이 모두 소비의 죄올시다.

그 근원은 모두 교낭자가 동청과 사통하여 갖은 추행을 일삼으면서

요녀 십랑과 공모하여 꾸민 간계였습니다.

한림께서 행주로 귀양가시게 된 것도

교낭자가 동청과 함께 엄승상에게 참소하여 꾸민 농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림께서 행주로 귀양가신 뒤에 교낭자는

동청을 따라 도망할 때도 형의 초상을 당하여

조상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댁에 있는 보화를 전부 훔쳐 가지고 갔습니다.

소녀는 비록 배우지 못한 비천한 계집이나 이런 해괴한 변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입니다.

또 교낭자의 투기와 형벌이 혹독하여 시비들을 악형으로 괴롭혔으매,

소비도 비록 한때 이용은 당했으나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목숨입니다."
하고 설매는 자기 소매를 걷고 팔뚝에 악형당한 흉터를 내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미천한 제 신세라 어미 품을 떠나서 호구지책으로 종의 몸이 되어서

그런 포악한 상전을 만났으니 누구를 원망하오며

제가 저지른 죄가 끔찍하오니 만 번 죽은들 어찌 속죄하겠습니까."
유한림이 설매의 보고와 참회하는 말을 듣다가 인아도 죽이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 크게 실성하고 아찔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유한림은,
"내가 어리석어서 음부에게 속아 무죄한 처자를 보전치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과 조상께 대하랴."
유한림이 탄식하자 설매는 인아를 죽이려던 경과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였다.
"교씨가 소비에게 인아 공자를 물에 넣어 죽이라는 명을 받고 강가에까지 갔었으나,

그때 비로소 소비의 잘못을 뉘우치고 차마 교씨 말대로 할 수가 없어서

길가의 숲에 숨겨 두고 가서 물에 넣었다고 거짓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혹 어쩌면 그 인아 공자는 어떤 사람이 데려다가 잘 기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렇게라도 되었으면제 죄의 만분지 일이라도 덜어질까 하고

공자의 생존을 신명께 빌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