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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24

Joyfule 2010. 2. 4. 10:09

 

    사씨남정기 - 김만중.24  

 

 

유한림이 배를 향하여 빨리 배를 대어서 사람 살려 달라고 구원을 청하였다.

배를 젓던 묘혜가 백빈주 물가로 배를 대려고 하자 사씨가 당황해서 묘혜를 말리면서,
"저 사람의 음성이 남자인데 이상한 남자를 이 배에 태워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묘혜는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급한 인명이 천금보다 귀중한데 목전에 죽을 사람을 어찌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급히 배를 저어서 물가로 대었다.

유한림이 배에 뛰어오르면서 애원하였다.
"도적놈들이 내 뒤를 쫓아오니 빨리 배를 저어 주시오."
조금만 늦었으면 유한림은 추격하던 동청의 부하 관졸에게 잡힐 뻔하였다.

체포 직전에 뜻하지 않은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본 괴한들은 호통을 치며 배를 불렀다.
"배를 도로 돌려 대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린다!"
그러나 묘혜는 못 들은 척하고 배를 저어 그들의 추격을 피해갔다.
"그 배에 태운 놈은 살인한 죄인이다.

계림태수께서 잡으라는 놈이니 그놈을 잡아오면 천금 상을 주신다."
유한림은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놈들이 보통 도적이 아니고 동청이 보낸 관졸임을 분명히 알았다.

머리끝이 새삼스럽게 쭈뼛해지고 전신에 소름이 끼친 유한림은 묘혜를 향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한림학사 유연수로서 살인한 죄가 없는데

저 도적놈들이 공연히 꾸며서 하는 소리입니다."
묘혜는 유한림이 선량한 사람인 줄로 알았으므로

도적들을 비웃는 듯이 닷줄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하였다.


창오산 저문 날에 달빛이 밝았으니
구의산의 구름 개는데 저기 가는 저 속객은
독행 천리 어디를 부질없이 가는가

 

유한림은 사지(死地)에서 뜻밖에 구해 준 배 안의 두 사람의 여자,

그 중의 늙은 여자가 부르는 이 노래의 의미도 알아들을 경황이 없었다.

이때 배 안에 담장소복으로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유한림을 보더니

놀랍고 반가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유한림이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보니 자기의 아내 사씨가 분명하지 않은가.
"부인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것이 웬일이오!"
유한림은 뜻밖에 만난 부인에게 인사한 후에

자연 나오는 탄식은 부인에 대한 자기 불찰의 후회와 사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제 무슨 낯을 들어 부인을 대하겠소.

부끄럽고 마음이 괴로워서 할 말이 없소.

그러나 부인은 정신을 진정하고 이 어리석은 연수의 불명을 허물하시오."


하고 설매에게 갓 듣고 온 소식을 마치 자백하듯이 말하였다.

즉 사씨 부인이 집을 떠난 후에 교씨가 십랑과 공모하고

방예로 저주한 일이며 또 설매가 옥지환을 훔쳐 내다가

냉진과 더불어 갖은 흉계를 꾸민 말을 다 하였다.

사씨 부인이 남편의 이런 뉘우치는 말을 듣고 감사하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한림께 이런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면 죽어도 어찌 눈을 감았겠습니까?"
하고 흐느껴 울었다.

 

한림이 또 설매를 꼬여서 장지를 죽이고 춘방에게 미루던 말과,

동청이 엄승상에게 참소하여 자기가 죽을 뻔하였다는 말과

교씨가 집안의 보물을 전부 가지고 동청을 따라간 경과를 알리자

사씨 부인은 기가 막혀서 묵묵히 울고만 있었다.

유한림은 부인이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야속히 여기는

분함을 풀지 않고 대답도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더욱 가슴이 답답하였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자식 인아가 죄도 없이 부인의 품을 잃고

아비도 모르게 강물 속의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으니 어찌 견딜 수 있겠소."
하고 탄식하는 유한림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사씨 부인은 처음부터 너무 놀라워서 말도 못하고 있었다가

유한림의 이런 말을 다 듣자 외마디 비명을 올리고 기절하고 말았다.

 

한림이 황급히 구호하여 부인이 정신을 차리자

한림은 실의 상태에 빠진 부인을 위로하려는 듯, 또는 요행을 바라는 듯이,
"설매의 말을 들으니 인아를 차마 물에 던져 죽이지 못하고

길가의 숲속에 숨겨 두었다 하니 혹 하늘이 도우셨으면

어떤 고마운 사람이 데려다 길러 주고 있을지도 모르니

만나지 못하더라도 어디서든지 살아 있기만 해도 내 죄가 덜할까 하오."
사씨 부인이 흐느껴 울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설매의 그 말인들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설사 숲속에 넣어 두었더라도 어린 것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서로 죽은 줄 알았다가 만난 부부는 반갑기보다도 어린 인아의 생사로,

새로운 슬픔에 사로잡혀서 오열하였다.
"아까 강가의 소나무를 깎고 쓴 필적을 보니

부인이 물에 빠져 죽은 유서가 분명하므로

슬픈 회포를 제문으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고혼이나마 위로하려고 하다가

마침 동청이 보낸 자객놈들을 만나서 데리고 오던

동자의 잠을 깨울 새 없이 쫓겨서 강가까지 왔으나

앞에 물이 막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 부인의 배로 생명의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하여 마지 않는데,

도시 부인은 어떻게 이곳에 와서 나를 구해 주었소?"


"제가 선산 묘하에 있을 적에 도적이 위조 편지를 하여

제가 속아서 납치될 뻔하였으나 시부님께서 현몽하셔서

모년 모월 모일에 배를 백빈주에 대령하고 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오늘이 바로 그때 분부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득히 잊고 있었던 것을 저 스님께서 기억하시고 있어서

오늘 배를 타고 왔더니 과연 한림을 위급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저 묘혜 스님은 우리 양인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아까 보셨다는 소나무의 유서를 쓰고 물에 뛰어들려고 했을 때에도

저 묘혜 스님이 구해다가 스님 암자에 지금까지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유한림이,
"우리 부부는 묘혜 스님의 힘으로 살았으니, 그 태산 같은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고 묘혜를 향하여 사례한 뒤에,
"지금 생각하니 묘혜 스님은 원래 서울에 계시던 스님이 아니십니까?"
"호호, 소승의 일을 한림께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만 하겠습니까.

당초에 우리 혼사를 담당해 주시고 이제 또 우리 부부를 구해 주시니

하늘이 우리 부부를 위하여 스님을 이 세상에 내신가 하옵니다."
묘혜가 유한림의 감사에 사양하면서,
"한림과 부인의 천명이 장원(長遠)하시기 때문이지 어찌 소승의 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말씀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빨리 소승의 암자로 가셔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하고 묘혜가 배를 젓기 시작하자 순풍이 불어서 순식간에 암자 있는 섬에 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