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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23

Joyfule 2010. 2. 3. 10:08

 


 

     사씨남정기 - 김만중.23  

 

 

이 말을 들은 유한림이 약간 미간을 펴고,
"다행히 너의 그 갸륵한 소행으로 인아가 살았다면 너는 그 애의 생명의 은인이다."
"밖에 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으니 지체하면 의심받을까 겁이 납니다.

떠나기 전에 한 말씀 급히 아뢰고 가겠습니다.

어제 악주에서 행인을 만나서 들은 소식이온데 한림부인께서 장사로 가시다가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져 돌아가셨다는 말도 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도움으로 살아 계시다고 풍문이 자자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겠으니 한림께서 수소문하여 자세히 알아보시고 선처하십소서."
하고 설매는 밖에서 부르는 동행 시비를 따라서 급히 나가 버렸다.

 

설매가 교씨의 행렬을 쫓아가자 교씨가 의심하고 늦게 온 이유를 추궁하였다.
"낙마한 상처가 아파서 곧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핑계하였으나 교씨는 의심이 많고 간특한 인물이라

설매를 데리고 동행해 온 시비에게 다시 물었다.
"설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가 그 앞집의 주점서

어떤 관위를 만나서 한동안 이야기하느라고 이토록 늦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더냐?"
"행주 땅에 귀양갔다가 풀려서 돌아오는 유한림이었습니다."
교씨가 깜짝 놀라서 행차를 멈추고 동청과 함께 선후책을 상의하였다.

동청도 대경실색하고,
"그놈이 죽어서 탸향 귀신이 될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오니

만일 다시 득의하면 우리는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건장한 관졸 수십 명을 뽑아서 유한림의 목을 베어 오면 천금의 상을 주리라고 명하였다.

 

이런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본 설매는 교씨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고

뒤로 가서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으므로 교씨는 그년 잘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때 유한림은 설매로부터 기막힌 소식을 듣고 힘없는 걸음으로 가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음부의 간교한 말을 듣고, 현처를 멀리하여 자식을 보전하지 못하고

일신이 이처럼 표박하게 되었으니 만고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처자를 보겠느냐.'
하고 악주에 이르러 강가를 배회하면서 부근 사람들에게

그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씨의 소문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유한림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끈덕지게 수소문하다가 어떤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어느 해 어느 달 어떤 부인이 시녀 두어 명을 데리고 악양루에서 밤을 지새고

강가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 후의 일은 모르겠다고 알려 주었다.

유한림은 그것이 필경 사씨로서 물에 빠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더욱 절망하고 슬퍼하였다.
유한림은 그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사방으로 배회하다가

큰 소나무 껍질을 깎아 거기에 큰 글씨로 쓴 것을 발견하였다.
'모년 모일 사씨 정옥은 이곳에서 눈물을 뿌리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유서를 발견한 유한림은 깜짝 놀라서 통곡하다가 그대로 기절하였다.

시동이 황망히 구원하여 한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탄식하였다.
"부인이 그 현숙한 덕행으로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억울한 물귀신에게 제사라도 지내서 위로하리라."
하고 제문을 지으려 하자 마음이 아득하여 눈물이 앞을 가려서 붓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때에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진동하였다.

놀라서 문을 열고 보니 장정 수십 명이 칼과 창을 들고서 들이닥치면서 외쳤다.
"유연수만 잡고 다른 사람은 상하지 말라!"
유한림이 놀라서 뒷문으로 도망쳐서 방향도 없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마치 그물을 벗어난 물고기 같고 함정에서 뛰어나온 범같이 정신없이 도망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앞길이 막히고 바다 같은 큰 물이 가로놓였으므로

정신이 아득하여 진퇴가 극히 어려웠다.
"유연수가 이 물가에 숨었으니 샅샅이 뒤져서 잡아라!"
뒤에서 추격하는 괴한들이 호통을 쳤다.

유한림은 이제는 잡혀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였다.
"내가 선량한 처자를 애매하게 학대하였으니 어찌 천벌을 받지 않으랴.

남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져서 스스로 죽으리라."
하고 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문득 배 젓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유한림이 그 뱃소리 나는 곳을 찾아 허둥지둥 가면서,
'어떤 사람이 나의 위급한 몸을 구해 주려는 것일까.'
하고 요행이라도 있기를 하늘에 빌었다.
동정호 섬에 있는 수월암의 묘혜 스님은

사씨 부인을 보호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씨에게,
"부인, 오늘이 사월 보름날인데 그 전에 하시던 말을 잊으셨나요?"
하고 물었다.

사씨는 세상과 인연이 없는 섬 속의 한가로운 암자에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체력이 필요없는 생활이라,

그 중대한 사월 보름날의 일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금년 사월 보름날에 배를 백빈주에 매고 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는 예언을 시부님 영혼이 가르치셨다 하셨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어서 백빈주로 배를 저어 가십시다."


사씨 부인은 그날 황혼에 배에 올라 백빈주로 저어 가면서

급해서 이 배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히 여기면서도

반가운 사람이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들자

자연 자기 신세의 슬픈 회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유한림이 뱃소리가 가까워 오는 강가로 내려가면서

물 위를 보니 어떤 여자가 일엽편주를 저어 구슬픈 노래를 탄식처럼 부르며 오고 있었다.

그 노래의 귀절이 유한림에게 들려왔다.

 

창파에 달이 밝으니 남호의 흰 마름[白濱]을 캐리로다
꽃이 아름다워 웃고자 하되 배 젓는 사람 슬퍼하는도다
이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또 다른 여자의 노래도 들렸다.
물가의 마름을 캐니 강남의 날이 저물었네
동청에 사람 있어 고인을 만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