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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27

Joyfule 2010. 2. 8. 08:08

    사씨남정기 - 김만중.27  

 

 

"이것은 모두 가운이매 어찌 인력으로 막았으리오."
유시랑이 친척들과 하직하고 강서로 갈 제 그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

이때 사추관이 누님을 데려오겠다고 말하자

유시랑은 허락하고 자기는 강가에 가서 맞을 테니 먼저 떠나가라고 약속하였다.
동생 사추관은 미리 편지를 보내고 동정호의 섬 군산사에 이르니

사씨 부인이 미리 알고 기다리다가 만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수년 동안 그리던 정회를 푼 뒤에 유시랑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씨 부인이 편지를 받아 보니 남편은 방백을 하였는지라

감격하여 묘혜 스님에게 사은하고 유시랑이 보내 온 예물을 전하였다.
"이것은 모두 부인의 복이지 어찌 소승의 공이겠습니까?"

 

이윽고 작별하게 되자 사부인과 묘혜 스님이 마치 모녀의 이별같이 서로 슬퍼하였다.

사추관이 묘혜에게 재삼 은혜를 치하하자

묘혜 또한 재삼 사양하고 앞으로도 여러분의 복록을 불전에 축원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사추관이 객당에서 자고 이튿날 부인과 함께 발정하자

묘혜가 암자의 여러 승니와 산에서 내려와서 떠나는 배를 기쁨과 슬픔으로 전송하였다.

일행이 약속한 지경에 강가에 배를 대니 유시랑이 이미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금수채장(錦繡彩帳)이 강변을 덮고 환영하는 사람이 물가에 정렬하고 기다렸다.

시비가 새 의복을 사씨 부인에게 올리매 부인은 칠 년 동안이나 입었던

소복을 비로소 벗고 화복으로 갈아입고 부부가 상봉하니 세상에 희한한 경사였다.

 

여기서 뱃길로 강서로 행하여 고향집에 이르니 비복들이 감격으로 환영하였다.

유시랑 부부가 묘에 참배할 제 제문을 지어서 부부가 재합함을 보고하는 사의가 간절하더라.

이 소문을 들은 강서 지방의 대소관원이 모두 유시랑을 찾아와서

예단을 드려 하례하고 또 사추관에게 하례하였으며,

유시랑은 큰 잔치를 베풀어서 빈객을 접대하였다.
사씨 부인은 남편을 만나서 다시 유가의 주부가 되었으나

새로운 슬픔이 있으니 아들 인아의 생사 소식이었다.

사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인아의 행적은 묘연하여 알 길이 없었다.

어느덧 신년을 맞으며 부인이 유시랑에게 은근히 술회하였다.


"그전에 제가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가사가 탁란하였던 일을 회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고 제 나이도 사십에 이르러서

생산하지 못한 지 십 년이라 밤낮으로 큰 걱정입니다.

 후손을 위하여 다시 숙녀를 얻어 생남의 길을 마련할까 합니다."
"후손을 위하여 소실을 권하는 부인의 뜻은 고마우나

그 전에 교녀로 말미암아 인아의 생사를 알지 못하매

통입골수(痛入骨髓)한데 어찌 또다시 잡인을 집안에 들여놓겠소?"
부인이 한숨을 짓고,
"제가 시랑과 동서 삼십 년에 일점 혈육이던 인아의 생사를 모르고

아직 사속(嗣屬)이 없으니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뵈오리까?"
"그러나 부인의 연기가 아직 단산할 때가 아니니 그런 불길한 말을 하지 마시오."
"상공은 그런 고집은 마시고 제 말을 들으십시오."
하고 묘혜 스님의 질녀가 현숙하고 또 귀자(貴子)를 둘 팔자라

하면서 유시랑의 첩으로 삼으라고 굳이 권하였다.

유시랑은 사씨 부인의 성의에 마지 못하여 묘혜 스님의 질녀라는 여자의 근본을 물은 뒤

부인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허락하였다.
"또 청할 일이 있습니다."
부인이 말을 바꾸어 남편에게 상의하였다.
"노복이 충성으로 나를 시중하다가 조난한 뱃속에서 죽었으니

그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겠으며, 또 황릉묘가 황폐하였으니 중수해야겠으며,

또 묘혜 스님의 암자가 있는 군산동구에 탑을 세워서 모든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유시랑이 부인의 청은 마땅히 하여야 할 사은의 지성이라 하고

모두 많은 재물을 희사하여 시설하였다.

묘혜 스님은 유시랑 부부가 보낸 후한 금백으로 곧 수월암을 중수하고

군산동구에 탑을 신축하여 부인탑이라고 불렀다.

특히 황릉묘를 장엄하게 중수하고 노복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관곽을 갖추어서 다시 후장을 지내준 데 대하여

사씨 부인의 기특한 뜻을 세상이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사씨의 사동이 황릉묘지기에게 중수 비용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회룡령 땅에 들러서 묘혜 스님의 질녀를 찾아갔다.

 

이때 그 낭자가 그 전에 알았던 사씨 부인의 사동을 보고도 채 알지 못하고 물었다.
"총각은 어디서 어떻게 또 이곳에 왔소?"
"낭자는 왜 나를 몰라보십니까?

연전에 사씨 부인을 모시고 장사를 가던 길에

댁에서 수일간 신세를 진 사환입니다."
"아참 그랬군. 내가 몰라뵈서 미안했어요. 사씨 부인은 안녕하신지요?"
사동이 그 후에 지낸 사씨 부인의 사실을 대략 전하자

낭자는 사씨 부인이 누명을 벗고 시가로 돌아가서 잘 계시다는 말과

그것이 모두 낭자의 고모님 묘혜의 공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인사가 끝난 뒤에 사환은 사씨 부인이 보낸 편지를 낭자에게 내놓았다.

임낭자가 감격하고 봉을 떼어 보니 사연이 매우 간곡하였으므로

사씨 부인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벌써 칠 년 전에 설매가 인아를 차마 물 속에 던지지 못하고

가만히 강변의 숲 속에 놓고 간 뒤에 인아가 잠을 깨어

아무도 없으므로 큰소리로 앙앙 울고 있었다.

이때 마침 나경으로 장사차 지나가던 뱃사람이 우는 어린아이를 찾아가 보니

얼굴 생김이 비범하고 가엾어서 배에 싣고 가다가

갈 길이 멀고 남경 가서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기로,

도중의 연화촌에서 인아를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운 곳에 내려놓고 갔었다.

이때 마침 임가의 아내 변씨가 꿈을 꾸었는데

문 밖에 이상한 광채가 비치었으므로 놀라서 깨니 꿈이었다.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들은 남편 임씨가 급히 울 밖으로 나가서 본즉

용모가 잘난 어린아이가 울고 있으므로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 변씨가 하늘의 꿈을 통해서 자기에게 준 귀동자라고 기뻐하고 고이 길렀다.

그러다가 변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임낭자가 친동생같이 기르고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용모가 고운 임낭자가 부모를 다 잃고 외롭게 지내게 되자

동정도 하고 탐도 나서 여러 군데서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낭자는 고모 묘혜 스님이 장차 귀한 몸이 되리라던 말만 생각하면서

시골 농부의 집으로 출가하기를 원하지 않고 장차 재상의 부인이 될 것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