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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10

Joyfule 2010. 1. 19. 01:24

 

 

    사씨남정기 - 김만중.10  

 

 

"사형(오빠)께서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고

또 천하의 일을 모를 것이 없이 지내셨는데 매양 사씨를 칭찬하되

우리 자부는 천하에 기특한 절대열부로서 옛날의 열부에 못하지 않다 하셨다.

또 네 일을 나에게 부탁하시기를 아직 연소하니

모든 것을 가르쳐서 그릇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다.

또 자부에 대하여는 모든 일에 별로 경계할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선친의 총명이 사씨의 범행숙덕을 잘 아시고 한 말씀이었으니,

그 교자지도(敎子之道)가 어찌 범연하셨겠느냐.

그렇지 않을지라도 선친의 유탁을 생각함이 인자의 도리어늘

하물며 선친의 식감과 사씨의 열행에 이 같은 누명을 씌워서 옥 같은 처자를 의심하느냐?

이것은 필경 집안에 악인이 있어서 사씨를 모해함이 아니면,

시비들 가운데 간음한 자가 있어서 옥지환을 도적질해 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엄중히 밝혀내지 않고 왜 그런 어리석은 의심을 하느냐?"
"고모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하고 유한림은 곧 형장지구를 갖추고 시비들을 엄중하게 문초하였다.

애매한 시비는 죽어도 모를 수밖에 없었고

장본인인 설매는 바른대로 고백하면 죽을 것이 분명하므로

끝까지 고문을 참고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시비들 가운데서

범인을 색출하지는 못하였으므로 두부인도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사씨는 누명을 깨끗이 씻어 버리지 못하였으므로 하당하여 죄인으로 자처했고,

유한림은 유한림대로 참언을 하도 많이 들었으므로

역시 사씨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으므로 집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교씨뿐이었다.
"선친께서 항상 말씀을 빚내어서 사씨를 옛날의 열부에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은 안하로 보니 첩인들 어찌 좋지 않은 일을 해서 남의 치소 능욕을 받겠습니까.

 첩의 소견으로도 두부인 말씀이 옳을까 합니다.

그러나 두부인 말씀도 역시 공평하지 못하셔서

사씨만 너무 칭찬하시고 한림을 너무 공박하시니 자못 체면이 없어서 민망스럽습니다.

옛날의 성인도 오히려 속은 일이 많사오니,

선친이 비록 고명하시나 사씨가 들어 온 후에 오래지 않아서 기세하셨으니

어찌 사씨의 심지를 예탁하심이며 임종시의 유언은 한림을 경계하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부인이 그 말씀을 빙자하여

모든 일을 사씨에게 상의하여 처리하라 강요하시니 어찌 편벽되지 않습니까?"


"사씨의 행색에 별로 구차한 점이 없어서 나도 이런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지금은 아무래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요전에는 방예물의 저주 필적이 사씨 필적 같아서

그때는 집안의 누구의 참언인가 하고 불살라 버리게 하였지만

옥지환이 없어진 일 같은 중대한 사건을 본 뒤로는 금후에 어떤 지경에 이를지 매우 불안하다."
하고 유한림이 사씨에 대한 현재의 심경을 말하자 교씨가 이때라고 다그쳐 물었다.
"그러면 사부인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그러나 지금 명백한 증참이 없으니 이대로는 다스릴 수 없고

또 선친께서 사랑하셨고, 또 초토(焦土)를 함께 지내었고,

숙모께서 그토록 두둔하시니 어찌 처치하겠는가."
유한림의 이런 신중한 태도에 교씨는 불만인 안색으로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교씨가 또 잉태하여 십 삭이 차서 남아를 낳았으므로

한림이 기뻐하고 이름을 봉추(鳳雛)라 하고, 교씨 소생 형제를 사랑함이 장중보옥 같았다.


교씨는 한림이 없을 때를 타서 동청과 함께 흉계를 꾸미고 있더니,
"요전에 행한 계교가 실로 묘하였소.

옛말에도 풀을 뿌리째 뽑아 없애야 한다고 했으니 앞으로 어찌할까요?

더구나 두부인과 사씨가 옥지환 없어진 근맥을 잡아내어서 그 내막이 누설되면 어떡할까요?"
교씨가 전후사를 근심하자 동청이 교씨를 위로하면서 교사하였다.
"두씨가 옥지환 사건을 극력 추궁하고 있으니 숙질간을 참소하여 이간시키시오."
"나도 그런 생각이 있어서 두부인과 한림 사이를 이간시키고자 하지만

한림이 두부인 섬기기를 모친 못지 않게 하여

모든 집안 일을 두부인 뜻에 순종하니 그 계략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면 묘책이 곧 생각나지 않으니 두고두고 상의합시다."
하고 사씨 음해를 끈덕지게 벼르고 있었다.


이때 두부인은 사씨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사람을 시켜서

옥지환이 없어진 단서를 잡지 못하고 심중으로 생각하기를,
'아무래도 교녀의 간계 같은데 단서를 잡지 못하였으니

그런 발설을 할 수도 없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하고 속을 썩이고 있었다.

그래서 유한림 집에 오래 머무르기도 거북해 하다가

아들 두억(杜億)이 장사부 총관으로 부임하므로 그 아들을 따라 장사로 가게 되었다.

자기는 아들을 따라서 장사로 떠나는 것이 좋으나

사씨의 고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침내 장사로 떠나는 날 유한림이 두부인 모자를 청하여

큰 환송잔치를 배설하였는데 그 좌상에 사부인이 보이지 않았다.

두부인이 자못 울적하여 유한림에게 원망스러운 말을 하였다.


"오라버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로 현질 한림과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이제 갑자기 만리의 이별을 하게 되었으므로

꼭 현질에게 한마디 부탁코자 하는데 내 말을 꼭 지키겠느냐?"
"소질이 비록 신의가 없을지라도 고모님 말씀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들려주십시오."
"다른 일이 아니라 사씨의 앞일을 부탁하련다.

사씨의 성행이 근엄하여 억울한 마음도 소견대로 변명하지 않으니 더욱 측은하다.

그 정렬한 점으로 보아서 무죄한 것이 틀림없으니

멀지 않아서 억울한 사실이 나타나려니와

만일 내가 이 집에서 없어진 후에 또 무슨 해괴한 일로 참언이 있더라도

곧이 들지 말며 혹 무슨 불미한 일이 있더라도 나에게 먼저 편지로 상의하고

내 의견이 있을 때까지 과하게 처치하지 말아서

나중에 경솔했다고 뉘우치는 일이 없게 하라."
"고모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교의를 근수하겠사옵니다."
유한림이 맹세하듯이 대답하자 두부인은 시녀를 불러서 물었다.
"사부인께서 어디 가시고 이 자리에 안 보이시느냐?

이 자리에 오시기를 꺼려하시거든 나를 그리로 인도하라."
시비가 두부인을 모시고 사씨 사는 곳으로 갔다.

가서 본즉 사씨가 녹발(綠髮)을 흐트린 채 얼굴이 창백하고

전신이 연약해져서 입은 옷 무게조차 이기지 못하는 듯이 애처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