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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 - 김만중.9.

Joyfule 2010. 1. 17. 23:21

 

    사씨남정기 - 김만중.9.  

  

 

"내가 일찍이 서연 사람에게 배워서 옥류를 좀 분별할 줄 아는데

자네가 가진 그 옥지환이 예사 옥이 아닌 듯하니 좀 구경시켜 주게."

청년이 옥지환 보인 것을 뉘우치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마지 못하는 듯이 옷고름을 끌러서 한림에게 내주었다.

유한림이 손에 받아들고 자세히 보니 옥의 색깔과 형태와 새긴 제도가

자기 부인 사씨의 옥지환과 똑같았다.

의심하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보니 더 이상하게 푸른 털실로 동심결이 맺어 있지 않은가.

더욱 의심이 깊어졌으므로 청년에게,
"참 좋은 보배로군. 그대는 그것을 어디서 구하였나?"
청년이 거짓으로 슬픈 모양을 꾸미고 묵묵히 옥지환을 받아서 도로 옷고름에 매었다.

유한림은 그 옥지환의 출처가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그 옥지환에 반드시 무슨 인연이 있을 텐데 나한테 말한들 무슨 거리낌이 있겠는가?"
청년이 오래 있다가 입을 열고,
"북방에 있을 때 마침 아는 사람에게 얻었는데 형이 왜 그리 캐어묻습니까?"
하고 그 출처를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유한림은 어떤 도적이 자기 부인의 옥지환을 훔쳤던 것을

이 사람이 우연히 산 것이 아닐까 하고 그 내막을 알아내려고 기회를 보았다.

 

그럭저럭 여러 날 동행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자연 친근한 길동무가 되었으므로 유한림은 또 물었다.
"자네가 그 옥지환에 동심결을 맺은 이유를 좀체로 말하지 않으니

어찌 그동안 길동무로 친해진 우정이라고 하겠는가?"
그러자 냉진이라는 청년이 마지못한 듯이,
"그동안 형과 정의가 깊어졌으므로 숨길 필요도 없지만

정든 사람의 정표로만 알고 나를 비웃지 말아 주십시오."
"그처럼 정든 사람이 있으면 왜 같이 살지 않고 남방으로 가는가?"
"호사다마하고 조물주가 시기하여 좋은 인연이 두 번 오지 않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옛날 말에 규문에 한번 들어가는 것이 깊은 바다에 들어감과 같다 하더니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소저와의 정사(情事)이매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냉진은 짐짓 자기 사랑의 고민을 고백하는 듯이 슬픈 기색을 하며 탄식하여 보였다.
"그러나 자네 염복(艶福)이 부러워."
하며 두 길동무는 종일토록 통음하고 다음날 오후 각각 길을 나누어 이별하였다.

유한림은 그 냉진이라는 청년과 우연히 길동무가 됐으나

수일 동안 동행한 자의 근본을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기 부인 사씨의 옥지환의 행방이 어찌되었는지 궁금하였으나

멀리 떨어진 산동 지방을 암행중이라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세상에는 이상한 일도 측은한 일도 많구나.

혹은 집안의 종들이 그 옥지환을 훔쳐 내다가 팔아 버린 것일까?

그러나 그 청년이 사랑하는 의중지인의 정표라던 넋두리는 무슨 관계의 뜻일까?'


유한림의 의심과 걱정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심란스럽기만 하였다.

그런 근심을 하면서 반 년 만에야 국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니

사부인이 친정에서 돌아와 있은 지도 오래였다.

유한림은 비로소 장모의 별세를 알고 부인과 함께 슬퍼하며 조상하고,

교씨와 두 아들 장지와 인아를 만나서 그립던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객지에서 냉진이라는 청년이 가지고 있던 옥지환이 궁금해서 사씨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전에 부친께서 내려주신 옥지환을 어디 간수해 두었소?"
"그대로 패물 상자에 넣어 두었는데 그건 왜 갑자기 물으세요?"
"좀 이상한 일이 있었기로 궁금해서 보고자 하오."
사씨 부인이 이상히 여기고 시비에게 금상자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상자를 갖다가 열고 본즉 다른 패물은 전부 그대로 있었으나 그 옥지환 한 개만 보이지 않았다.

사씨 부인이 깜짝 놀라서,
"분명히 이 상자 속에 넣어 두었는데 이게 웬일일까요!"
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한림의 안색이 급변하고 말을 하지 않으므로 더욱 당황해서 물었다.
"그 옥지환의 행방을 한림께서 아십니까?"
유한림이 얼굴을 붉히고,
"자기가 남에게 주고서 나한테 묻는 건 무슨 심사요?"


사씨 부인은 이 같은 남편의 뜻밖의 말을 듣고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착잡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시비가 두부인께서 오셨다고 고하였다.

유한림이 황망히 나가서 고모를 맞아들여서 인사를 나눈 뒤에

두부인이 먼 길의 무사왕복을 위로하였다.

이윽고 유한림은 두부인을 향하여,
"제가 출타중 집안에 대변이 생겨서

곧 고모님께 상의하러 가려던 참에 잘 오셨습니다."
"아니, 집안에 무슨 대변이 생겼기에?"


유한림이 흥분을 진정하면서 냉진이라는 청년을 만나서

옥지환을 보고 또 그에게 들은 말이 이상해서

집에 와서 옥지환을 찾아보았으나 과연 없으니

이 가문의 큰 불행을 장차 어찌 처치할까 하고 상의하였다.

사씨 부인이 유한림의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첩의 평일의 행색이 성실치 못하였기 때문에

주인이 의심하고 지금 이런 누명을 쓰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대하겠습니까?

첩의 입으로는 변명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한림의 뜻대로 하십시오.

옛말에 이르기를 어진 군자는 참언을 신청(信聽)하지 말고

참소하는 자를 엄중히 다스리라 하였으니 한림은 살피셔서 억울함이 없게 하십시오."
두부인이 변색을 하고 유한림을 꾸짖었다.
"너의 총명이 선친과 비교하여 어떠냐?"
"소질이 어찌 선친께 따를 수 있습니까?"
유한림이 황송해 하면서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