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2

Joyfule 2010. 2. 24. 09:42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2  

"그럼, 때때로 생각해."하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녀 말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마치 상처받은 새처럼 그녀의 말이 땅에 떨어지게 내버려둔 채 말을 계속했다.
"밤에 떠난다. 
여명의 눈부신 햇살 속에 서 잠을 깬다. 
믿지 못할 파도 위에 단둘임을 느낀다...."
"그러고는 아주 어렸을 때 지도에서 보았던 어느 항구에 도착한다. 
거기서는 온갖 것이 낯설고... 
오빠가 팔에 기댄 알리싸와 함께 배에서 발판으로 내려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애."
"우리는 바로 우체국으로 가서."하고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줄리에뜨가 우리에게 부쳐 준 편지를 찾고...."
"이 줄리에뜨가 남아 있는 퐁궤즈마르에서 부친 편지를
아마도 오빠와 언니에게 퐁궤즈마르는 작고 쓸쓸하고 까마득하게 보일 거야...."
이것이 분명 그녀의 말이었는지 나는 단언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사랑의 표현 말고는 아무 이야기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둥그런 갈림길 근처에 다다랐다. 
막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별안간 그늘에서 알리싸가 나타났다. 
그녀의 안색이 너무나도 창백하여 줄리에뜨는 질색하여 소리를 쳤다.
"정말 몸이 이상해."하고 알리싸는 중얼거렸다.
"바람이 차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고는 곧 우리 곁을 떠나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돌아가 버렸다.
"우리가 하던 이야기를 들었어."
알리싸가 좀 멀어지자마자 줄리에뜨가 소리쳤다.
"하지만 알리싸가 기분 상할 이야기는 없었어. 반대로...."
"가겠어."
언니 뒤를 쫓아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알리싸는 저녁 식사 때 나타났지만 곧 골치가 아프다고 하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우리의 대화에서 무엇을 들었던가? 
그리하여 나는 걱정스럽게 우리가 하던 말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줄리에뜨에게 몸에 팔을 감고 있었다는 것이 
아마 잘못이었는지 무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미 어릴 때부터 우리가 늘 하던 버릇이 아니었던가. 
뿐만 아니라 알리싸는 이미 몇 차례나 우리가 그렇게 걷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아! 나는 스스로의 잘못을 더듬어 찾고 있으면서도,
내게 잘 들리지 않아서 기억도 별로 나지 않는 줄리에뜨의 말을 
알리싸가 나보다 더 잘 알아들었으리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질 못했으니 나는 얼마나 슬픈 장님이었던가. 
할 수 없지! 
불안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알리싸가 나를 의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나서, 
나는 또다른 위험이라곤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채 
줄리에뜨에게 내가 한 말에 구애 없이, 
어쩌면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자극되어 
나는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기 위해 다음날 약혼을 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가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려니 싶었다. 
그녀는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단둘이서는 만나지도 못한 채 해가 져버렀다. 
서로 이야기도 나눠보지도 못한 채 떠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나는 저녁 식사 조금 전에 그녀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산호 목걸이를 거는 중이었는데 
그것을 걸어매려고 두 팔을 올린 채 등을 문 쪽으로 돌리고 
두 개의 촛불 사이에 있는 거울 속을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본 것은 거울 속에서였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얼마동안 그대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문이 닫혀져있지를 않았니?"
그녀는 말했다.
"노크를 했는데 대답이 없었어. 알리싸, 내가 내일 떠나는 걸 알고 있어?"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끝내 걸어매지 못한 목걸이를 벽난로 위에 놓았다.
 '약혼'이란 말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거칠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생각나는 대로 종잡을 수 없이 빗대어 말했다. 
그녀는 나의 말뜻을 알아듣자 휘청거리는 듯 벽난로에 몸을 기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몸이 너무나 떨렸기 때문에 그녀를 쳐다보는 것을 조심조심 피했다.
나는 그녀 곁에 있었고 눈을 들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피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약간 숙이면서 
내 손을 들어 입술에 갖다대고 기댄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제로옴, 아니야! 약혼하지 말자. 제발...."
내 심장이 너무나도 뛰었기 때문에 그녀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한결 다정스럽게 말했다.
"안 돼! 아직은...."
그리고는 내가,
"왜?"하고 묻자,
"묻고 싶은 건 애 편이야, 왜 이 상태를 바꾸자는 거야?"
나는 감히 그 전날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내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음인지 
내 생각에 답하는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넌. 
나는 그렇게까지 행복해질 필요가 없어. 이대로 우린 행복하지 않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그렇지 않아, 널 두고 떠나야 하니까."
"이봐, 제로옴. 오늘 저녁엔 이야기 못하겠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지 말자... 
아냐, 아냐, 난 한결같이 널 사랑하고 있어, 
안심해. 내가 편지 쓸게, 이유를 설명할께. 꼭 쓸게, 내일이라도...
네가 떠나면 곧, 자 이젠 가! 어머나, 우는 것 좀 봐...가 줘."
그녀는 나를 밀어내더니 조용히 몸을 빼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작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한 마디 말도 못했고, 
이튿날 내가 떠날 때도 그녀는 자기 방에 있었다. 
나를 태운 마차가 멀어져 가는 것을 창가에서 바라보며
 작별의 손짓을 하고 있는 그녀를 나는 보았다.@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