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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11

Joyfule 2010. 2. 23. 08:32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1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곧 여느 때와 다른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 읊었다.
잘 있거라, 우리의 너무나도 짧았던
우리들 여름날의 화려한 빛이여!
"아니, 너 그걸 알고 있었니?"하고 나는 놀라 소리쳤다.
"넌 시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왜? 오빠가 내게 읊어 주지 않아서?"
그녀는 웃으면서 다소 부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때때로 오빠는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애."
"아주 총명하면서도 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 
난 한 번도 네가 시 이야기 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고, 
또 너도 나한테 시를 읊어 달라도 부탁해 본 적이 없지 않아?"
"그야 알리싸가 도맡고 있으니까...."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모레 떠나는 거야?"하고 물었다.
"그래야겠어."
"이 겨울에는 무엇을 할 작정이야?"
"사범 학교 1학년이야."
"알리싸하고는 언제 결혼할 거야?"
"병역을 마치기 전에는 안되겠지. 
그리고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더 잘 알기 전에는 안 할 생각이야."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어?"
"아직 알고 싶지도 않아. 
마음 끄는 일이 너무나 많아 무엇이든 하나를 택해서 
그것에만 몰두해야 하는 그러한 시기를 난 될 수 있는 대로 미룰 생각이야."
"약혼을 미루는 것도 생활이 고정될까 두려워서야?"
나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그녀는 다그쳐 물었다.
"그럼 왜 약혼을 미루고 있어? 왜 당장 약혼하지 않는 거야?"
"구태여 약혼할 필요가 어디 있니? 
세상 사람들이야 알든 말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우린 서로가 짝이 아냐? 
나는 내 생명을 그녀에게 바치려 하고 있는데 
네 애정을 무슨 약속 따위로 얽어매는 편이 좋아 보일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맹세 같은 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야... 
알리싸를 믿지 못하게 되면 그녀와 약혼을 하지."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알리싸가 아니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내가 뜻하지 않게 알리싸와 그 아버지의 대화를 엿들었던 정원까지 왔다. 
그러자 불현듯 좀 전에 정원 쪽으로 나가던 알리싸가 
어쩌면 지금쯤 그 둥그런 갈림길에 앉아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직접 대해서는 하지 못하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직접 들려 주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유혹했다. 
내가 꾸민 연극에 신이 나서 소리를 높여,
"아아."하고 내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하는 
좀 과장된 감격적인 어조로 나는 외쳤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에 너무나 열중했기 때문에 
줄리에뜨가 하는 말 속에 그녀가 입에 올리지 않고 있는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 사랑하는 이의 영혼 위에 몸을 굽혀 
우리가 그 영혼 속에 비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마치 거울 속처럼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속에서도 자기 자신 속에서처럼 아니, 
자기 자신 속에서보다 한층 뚜렷이 지기의 모습을 헤아려 볼 수 있기만 하다면! 
애정은 얼마나 부드러워질까! 사랑은 또 얼마나 순수해질까...."
줄리에뜨가 쓰라린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이 내가 늘어놓은 이 값싼 서정이 자아낸 효과라 생각하고 흡족해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로옴, 제로옴, 꼭 알리싸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다짐해 줘. 
만일 오빠로 인해 언니가 고민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난 정말로 오빠를 미워할 테야."
"하지만 줄리에뜨."
나는 그녀를 끌어안아 이마를 쳐들면서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을 증오하게 될 거야. 내가 알아 주기만 한다면... 
내가 아직 앞길을 결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알리싸와 함께 좀 더 훌륭한 생활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알리싸 없이도 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난 하고 싶지 않아..."
"오빠가 그런 이야기할 땐 알리싸는 뭐라고 하지?"
"하지만 난 그런 얘길 알리싸에겐 전혀 하질 않아. 
우리가 아직 약혼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야. 
결혼이라든가 또 그 다음에는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선 
우린 아직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 
아, 줄리에뜨! 알리싸와 함께 있는 삶이 얼마나 행복하게 되는지 
나는 감히... 알겠지? 그녀에겐 감히 그런 이야길 못해."
"갑자기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아니, 그게 아니야. 단지 두려워... 
알리싸를 겁내게 할까 봐, 알겠니?... 
내가 예상하는 그 큰 행복에 알리싸가 겁내지 않을까 두려워서! 
언젠가 알리싸에게 여행하고 싶지 않는다고 하면서 
단지 그러한 나라들이 있고, 그러한 아름다운 나라들에 
남들이 가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거야."
"오빠는 여행하고 싶어?"
"어디든지 다 가보고 싶어! 
삶 자체가 내게는 긴 여행으로만 보여. 
그녀와 함께 여러 가지 책과 온갖 사람들과 
여러 나라를 거쳐가는 긴 여행 같애...
'닻을 올려라'하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