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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14

Joyfule 2010. 2. 27. 08:35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4  

"고모님은 반대할 걸 예측했던 거야. 
그래 편지 덧붙임에 에뜨와르 떼씨에르 씨는--그 사람 이름이야--
시기를 기다리는 건 별문제 아니며 벌써부터 후보를 하는 것은 
단지 '선수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어...
터무니없는 짓이지. 하지만 어떻게 해? 
그 사람이 너무 못났다고 전해 달랄 수도 없고!"
"그럴 순 없지. 하지만 포도 재배자에겐 시집가고 싶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 않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그런 건 다 고모한텐 통하지 않는 이야기야...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해. 알리싸가 편지했어?"
그녀는 아주 구변 좋게 말을 했지만 무척 흥분되어 있는 듯했다. 
알리싸의 편지를 내가 내밀자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읽었다.
"그래 오빠는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말소리에는 노여움이 서 있는 듯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어."하고 나는 대답했다.
"막상 여기 와보니 차라리 편질 쓰는 편이 좋았을 것 같애. 
그래서 온 것을 벌써 후회하고 있어.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니?"
"오빠를 자유롭게 해주려는 거야."
"하지만 내가 뭐 그런 걸 바라고 있나? 
그런데 알리싸가 왜 이 편지를 했는지 알겠니?"
"몰라!"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 매몰찼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진정한 이유는 짐작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일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그 순간부터 믿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리가 따라 걷고 있던 오솔길이 다시 오던 길로 되도는 굽이에서 
그녀는 갑자기 발길을 돌리면서 말했다.
"이젠 갈래. 나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오빠가 온 건 아니니까. 
너무 오래 같이 있었어."
그녀가 집으로 달려간 잠시 후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되는대로 
즉흥적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자기를 보러 온 아벨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남겨 놓은 채 나왔다. 
그리고는 알리싸를 찾아 한참 동안 정원을 헤매다녔다.
그녀는 과수원 안쪽 담 밑에서 너도밤나무 숲의 가랑잎 냄새에 
그 향기가 뒤섞여 나는 첫 국화를 꺾고 있었다. 
대기에는 가을이 담뿍 배어 있었다. 
울타리에 내리쪼이는 햇살도 겨우 온기를 던져 줄 뿐 하늘은 동녘 나라인 양 맑았다. 
아벨이 여행 선물로 갖다 주어 당장 쓰고 나온 
젤란드식의 큼직한 모자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틀에 끼인 듯 네모반듯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처음에는 돌아다보지 않았지만 
억제하지 못하고 가볍게 몸을 떠는 것으로 보아 
내 발자국소리를 알아 챈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벌써 그녀가 할 책망과 그녀의 눈길이 
나로 하여금 느끼게 할 준엄성에 대비해 마음을 긴장시키고 용기를 냈다. 
그러나 아주 가까이 이르러 조심스럽게 걸음을 늦추자 
그녀는 처음엔 얼굴을 돌리지 않았지만 마치 성난 어린애처럼 얼굴을 숙인 채 
꽃을 담뿍 쥐어든 손을 나를 향해 둥 뒤로 내밀면서 오라고 청하는 시늉을 했다. 
이러한 몸짓에 오히려 이번에는 내가 일부러 멈추어 서자, 
비로소 그녀는 몸을 돌려 내게로 몇 걸음 걸어오더니 얼굴을 드는 것이었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길에 비추어지자 온갖 것이 갑자기 다시금 단순하고 쉽게만 생각되어 
나는 변함없는 목소리로 힘들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편지를 보고 다시 왔어."
"그럴 줄 알았어."하고는 그녀는 신랄한 책망조의 억양을 부드럽게 하면서,
"내가 화를 내는 것도 바로 그 점이야. 
왜 내 맘을 오해하지?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하고 말했다.
"그러자 벌써 슬픔과 번민은 정말로 나 혼자 꾸며 댄 것이어서 
단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듯싶었다".
"내가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대로 행복하잖아? 
그러니 그것을 네가 바꾸자는 데 내가 반대한대서 놀랄 것은 없는데?"
"사실 그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행복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다시는 그녀의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나는 그녀의 미소밖에는, 
그리고 이렇게 그녀와 더불어 꽃이 만발한 오솔길을 
그녀 손을 잡고 거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다.
"그러는 편이 좋다면...."하고 나는 그 순간의 완전한 행복에 몸을 맡기고 
모든 다른 희망을 포기한 채 엄숙하게 말했다.
"그러는 편이 좋다면 약혼하지 않기로 해.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난 내가 정말 행복하다는 것과 
이제부터는 그 행복이 사라져 버리려 한다는 것을 동시에 깨달았어. 
아! 옛날의 내 행복을 다시 돌려 줘. 그 행복 없이는 못견디겠어. 
일생을 기다려도 좋을 만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거나 내 사랑을 의심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알리싸, 난 정말 못견디겠어."
"아아! 제로옴, 난 그걸 의심할 수는 없어."
이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쓸쓸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환히 빛내 주던 미소가 
너무도 티없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의구심을 갖고 항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의 목소리 깊이 내가 느낀 그 서글픔의 여운도 
그러고 보면 단지 나의 두려움과 형변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나는 나의 계획, 공부, 
그리고 얻을 것이 많을 내 새 생활에 관해 횡설수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에꼴르 노르말르는 최근 개편된 것과는 퍽 달라 몹시 규율이 까다롭기는 했지만, 
게으르다든가 다루기 까다로운 학생들에게나 구속감을 주었을 뿐 
부지런히 노력하는 학생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거의 수도사적인 이 관습이 사회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사회란 별로 내 마음을 끌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알리싸가 두려워하게 되면 나도 대번에 싫어질 그러한 것에 불과했다.
미수 아슈뷔르똥도 없으니 일요일이 되면 아벨과 함께 거기에 가서 몇 시간 보내리라. 
일요일마다 나는 알리싸에게 편지를 쓰며 내 생활을 낱낱이 알려 주리라.
이때 우리는 열어젖힌 온실 유리창에 걸터앉아 있었다.
알리싸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그처럼 조심성 있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 
그처럼 절실한 그녀의 애정을 나는 일찍기 느낀 일이 없었다. 
근심과 걱정 그리고 아주 작은 마음의 동요까지도 
푸른 하늘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안개처럼 
그녀의 미소 속으로 증발되고 그 애틋한 친밀감 속에 흡수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