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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16

Joyfule 2010. 3. 2. 06:50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6   

새해 방학까지는 너무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전번 알리싸와의 대화로 열광된 나의 믿음은 
잠시도 동요되지 않았다. 
계획했던 대로 나는 일요일마다 그녀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외의 날에도 동급생들과는 떨어져서 아벨을 만날 뿐 
단지 알리싸를 그리워하며 살았고,내가 좋아하는 책에는 
내 자신이 거기서 얻는 흥미보다도 
알리싸가 맛볼 수 있는 재미를 먼저 고려하여 
그녀에게 도움이 되도록 여러 가지 표를 했다.
그녀의 편지에는 여전히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이 있었다. 
비록 내 편지에 대해 꽤 규칙적으로 답을 해주기는 했지만 
나를 따라 오는 그녀의 열성은 마음으로 이끌린다기보다는 
오히려 내 공부를 격려해 주려는 배려가 엿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감상, 토론, 비평 등이 내게는 단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나타내려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음에 생각을 내게 숨기려는 것 같았다. 
때로 나는 그녀가 그것으로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 있으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나는 
편지 속에 전혀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12월 말 경, 아벨과 나는 르아브르를 향해 떠났다.
나는 쁠랑띠에 이모 댁에 머물렀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모는 집에 없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가 있자, 곧 하인이 오더니 
이모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내 방에 들어가 있자, 
곧 하인이 오더니 이모가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내 건강, 숙소, 공부에 관해서 대충 듣고 나자 이모는 곧 
그 애정이 넘치는 호기심에 이끌려 아무 조심성 없이 말했다.
"퐁궤즈마르에서는 만족했는지, 
너는 내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 일이 좀 진척됐니?"
나는 이모의 이 어설픈 친절을 참아야만 했다. 
아무리 순수하고 다정한 말씨로 대해 줘도 역시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그러한 감정을 이처럼 간단히 다루는 걸 듣는 건 괴로웠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이모의 어조가 너무나도 구김살 없고 
정다왔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꾸를 좀 했다. 
"지난 봄에는 약혼이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시기 않았어요?"
"그래, 나도 안다. 처음에는 으레 그렇게 말하는 법이야."
이모는 나의 한 손을 잡아 자기의 두 손 안에 
감동적으로 꼭 쥐면서 서슴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네 공부라든가 병역 때문에 몇 해 더 기다리기 전에는 결
혼을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약혼을 오래 끄는 것은 불찬성이야. 
그렇게 되면 처녀들은 지쳐버리거든. 때때로 그것은 아주 딱하게도 여겨진단다. 
그건 그렇고, 약혼은 반드시 공개해 둘 필요가 있어. 
단지 그렇게 하면 남들이...아무렴, 은근히 속짐작으로 
이제는 그 처녀에게 손을 뻗쳐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해 두면 너희들도 편지나 교제를 떳떳이 할 수 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청혼해 오면...그것도 물론 있을 법한 일이지."
이모는 그럴 듯한 웃음을 띠면서 암시조로 말했다.
"그런 경우에는...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게 됐습니다라고 은근히 거절할 수도 있단 말이다. 
너도 알겠지만 줄리에뜨한테 청혼이 들어왔단다. 
올겨울에 그 애는 남의 눈에 무척 띄었거든. 그 애는 아직 좀 어리지. 
그래 그 애도 그걸 이유로 대답했어. 한데 그 청년은 기다리겠다는 거야. 
정확히 말해서 그 사람은 이미 청년이 아니야. 
아무튼 좋은 자리야. 아주 틀림없는 사람이지. 너도 내일이면 볼 거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 올 테니까. 
네가 본 인상이 어떤지 내게 좀 말해 주려무나."
"이모, 모르긴 하지만 그 남자는 헛수고하는 게 아닐까요.
 줄리에뜨에게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에요."
나는 아벨의 이름을 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응?"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모는 입을 뾰족 내밀고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의심쩍다는 듯이 말했다.
"놀라운 얘기구나, 그렇다면 왜 그 애가 내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줄리에뜨는 요즘 좀 앓고 있단다...."
하고 이모는 다시 계속했다.
"우린 지금 그 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그래? 
알리싸도 귀여운 아이야, 그런데 그 애한테 선언을 했니 안했니?"
이 '선언'이란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거친 듯해서 나는 발끈했으나 
거짓말을 못하는 성미라 정면으로 질문을 받자 그만 우물쭈물 대답해 버렸다.
"네."
그러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래 그 애는 뭐라고 하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한층 더 막연히, 그리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약혼하길 반대했어요."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어."하고 이모는 소리쳤다.
"너희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그렇구말구...."
"제발 그 이야긴 그만 해요, 이모."
나는 말을 막으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 애로선 있음직한 일이야. 그 애는 언제나 너보다는 분별이 있어 보였으니까."
나는 이때 무엇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긴 했으나, 
아마 그렇게 다그쳐 물어서 흥분되었음인지,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래서 마치 어린애처럼 마음씨 좋은 이모의 무릎에 이마를 비벼 대며 흐느끼면서,
"아니에요. 이모, 이모는 몰라요."하고 소리쳤다.
"그 애는 기다려 달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뭐라고? 그 애가 너를 싫어하기라고 한단 말이냐?"
이모는 손으로 내 이마를 받쳐올리면서 퍽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아니에요...아니에요. 확실히 그런 것도 아니에요."
나는 서글프게 머리를 저었다.
"이제는 그 애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니?"
"아아! 아니에요, 제가 두려워하는 건 그가 아니에요."
"얘야, 좀 더 분명하게 말을 해야 내가 알지."
약한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나는 부끄럽고 슬펐다. 
내가 애매한 태도를 취한 동기를 이모는 틀림없이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알리싸가 약혼을 거절한 이면에 어떤 뚜렷한 동기가 있다면 
이모가 나를 도와 부드럽게 그녀에게 물어 봄으로써 
그것을 밝혀낼 수도 있을 성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