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9

Joyfule 2010. 3. 5. 08:09
 
좁은 문 - 앙드레 지드.19   

"아! 농담은 제발 그만둬!"
"어째서? 참 우스운 이야기야... 그녀는 자기 언니 방으로 뛰어갔어. 
그러자 느닷없이 격렬한 소리가 들려 와, 난 깜짝 놀랐지. 
잠시 후에 줄리에뜨가 다시 나온 줄 알았는데 
나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앞을 지나가면서 
잽싸게 '안녕하세요?' 하더군...그것뿐이야."
"줄리에뜨는 다시 보지 못했니?"
아벨은 약간 망설였다.
"봤어, 알리싸가 가버린 후에 방문을 열었지. 
줄리에뜨는 난로 앞 대리석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꼼짝 않고 서 있었어.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내 기척을 듣더니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발을 흔들어 대면서 
'제발 나가 줘요!' 하는데 그 어조가 어찌나 매몰찬지 
더 묻지도 않고 나와 버렸어. 그게 전부야."
"그래 이제부터는?"
"아!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봄 낫군. 그래 이제부터는, 
글쎄...넌 이제부터 줄리에뜨의 사랑이 식도록 해야겠지.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러기 전엔 알리싸는 네게 돌아오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걸었다.
"돌아가자."하고 마침내 그가 말했다.
"손님들도 이제는 다 갔을 거야. 아버지가 날 기다리실지도 모르고."
우리는 돌아왔다. 과연 응접실은 텅 비어 있었다.
문간방에는 장식이 다 떨어지고 촛불도 거의 다 꺼진 크리스마스트리 곁에 
이모와 그 두 아이들, 뷔꼴랭 삼촌, 미스 아슈뷔르똥, 목사, 사촌 누이들, 
그리고 이모가 여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과, 
그가 바로 줄리에뜨가 말하던 청혼자라는 것을 이때 처음 알게 된,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사나이 뿐 아무도 업었다. 
우리들 중 누구보다도 크고 튼튼하고 대머리에 혈색이 좋으며, 
다른 계급, 다른 사회, 다른 종족에 속한 그 사나이는 
우리 사이에 끼인 것이 퍽이나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는 희끗희끗한 거창한 카이제르 수염 끝을 
초조한 듯 잡아 당겼다 비볐다 하는 것이었다. 
문이 활짝 열린 현관에는 이제 불빛도 없었다.
우리 둘이 소리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가 와 있는 줄 몰랐다.
오싹하는 어떤 예감이 나를 엄습했다.
"멈춰!"
아벨이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우리는 그 낯선 사나이가 줄리에뜨에게 다가가서는 
그녀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내맡긴 손을 잡는 것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이 내 가슴을 덮었다....
"아벨,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야."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혹은 잘못 알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글쎄! 저 애는 경매를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언니한테 지기 싫다, 이 말이지. 
천사들도 하늘에서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을 거야."
삼촌이 오더니 미스 아슈뷔르똥과 이모에게 둘러싸여 있는 
줄리에뜨의 뺨에 입맞추었다. 
보띠에 목사도 가까이 왔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알리싸가 나를 보고 뛰어오더니 떨면서
"제로옴, 이럴 수가 없어. 그 애는 저 이를 사랑하지 않아. 
바로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말했어. 제발 좀 말려, 제로옴. 
아아! 저 애가 어떻게 되려고...."하고 낮은 소리고 부르짖었다.
그녀는 절망적인 애원을 하면서 내 어깨에 매달렸다. 
그녀의 이 고통을 덜어 줄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었다.
갑자기 크리스마스트리 곁에서 고함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는 달려갔다. 줄리에뜨가 의식을 잃은 채 이모의 팔에 안겨 있었다. 
모두가 다급히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내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무섭도록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귀로 잡아당기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몸이 그처럼 경련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보통으로 기절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하고 이모는 
벌써 어절 줄 모르는 뷔꼴랭 삼촌을 안심시키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보띠에 목사도 집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위로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흥분한 때문이야. 신경이 좀 발작 한 것 뿐이야. 
떼씨에르 씨, 튼튼하시니까 좀 거들어 줘요.
내 방으로 올려가야겠어요. 애 침대로...."
그리고 나서 이모가 자기 맏아들 쪽으로 몸을 굽혀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이자 
그는 의사를 청하러 가는 듯 곧 나가 버렸다.
이모와 그 청혼자는 그들 팔에 몸을 반쯤 젖히고 
안기어 있는 줄리에뜨를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받치고 있었다. 
아벨은 자칫하면 뒤로 떨어질 듯한 머리를 받쳐 주고 있고, 
몸을 굽혀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모으며 마구 입을 맞추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줄리에뜨는 침대 위에 뉘어졌다. 
알리싸가 떼씨에르 씨와 아벨에게 몇 마디 말을 했지만 내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까지 그 두 사람을 따라 나와서 쁠랑띠에 이모와 
단둘이서 간호하고 싶으니 자기 동생이 안정하도록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다.
아벨이 내 팔을 잡고 밖으로 이끌어, 
우리는 아무런 목표도 용기도 생각도 없이 오랫동안 어둠 속을 거닐었다.
알리싸에 대한 사랑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이유였다. 
나는 그 사람에 매달렸으며 그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또 기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다음날 내가 그녀를 만나러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모가 나를 잡더니 금방 받은 편지를 내게 내밀었다.
줄리에뜨의 그 심한 흥분은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준 몰약으로 아침결에야 겨우 가라앉았습니다.
당분간 제로옴이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줄리에뜨가 그의 발걸음 소리나 목소리를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아서인데, 
지금 그 애에게는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줄리에뜨의 상태로 보아 아무래도 제가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제로옴이 떠나기 전에 제가 만나지 못하게 되면 
후에 제가 편지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이 방문 금지는 순전히 나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모나 그 외의 누구도 뷔꼴랭 댁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고, 
이모는 오늘 아침에도 거기에 갈 셈이었다. 
내 발걸음 소리? 목소리? 얼마나 어설픈 구실인가... 아무든 좋다.
"좋습니다. 가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