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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21

Joyfule 2010. 3. 8. 10:37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1   

고모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생각하고 
제로옴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처럼 긴 편지를 쓰지는 않겠어요. 
제로옴에 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제가 직접 그와 이야기 못하는 걸 보상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자주 계속 쓰게 될까 두려워 이만 그치겠어요. 
이번만은 너무 꾸중하지 말아 주세요.
이 편지를 읽고 나는 얼마나 숙고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모의 주착없는 참견"편지 속에서 알리싸가 잠깐 비친 이야기, 
내게 침묵을 지킨 그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게 이 편지를 전해 주도록 이모를 충동한 그 어색한 친절을 저주했다. 
이미 내가 알리싸의 침묵을 견딜 수 없게 될 바에야, 
아! 그녀가 이젠 내게 하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써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차라리 모르게 내버려 두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러고 보니 모두가 짜증나는 일 뿐이었다. 
자기와 사이의 사소한 비밀 그처럼 쉽사리 이야기하다니. 
게다가 그 자연스런 어조, 태연한 모습, 진지한 태도, 쾌활한 문맥....
"그게 아니라니까. 네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는 사실 외엔 
화낼 건더기가 아무것도 없는 거야."하고 아벨이 말했다. 
그는 하루하루 내 생활의 짝이었고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 때문에 아벨에게만은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외로울 때문 약해지는 마음, 남의 동정을 구하고 싶은 슬픈 마음,
 스스로에 대한 불신임, 그리고 내가 곤란한 처지에서도 
그의 충고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신뢰의 마음에서 
언제나 나는 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나 좀 검토해 보자!"
그는 편지를 자기 책상 위에 펴면서 말했다.
이미 나는 사흘 밤을 분한 마음으로 보냈으며 
그 분노를 나흘이나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아벨이 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나도 자연히 끌려들어갔다.
"줄리에뜨와 떼씨에르의 문제는 사랑의 불길 속에 내던져 버리자, 응? 
사랑의 불길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너나 나나 잘 알지 않아? 
그렇구말구! 떼씨에르는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 타죽는 나비 격이지...."
"그런 이야긴 그만 두자."
나는 그의 농이 귀에 거슬려 말했다.
"나머지 문제나 이야기하자."
"나머지 문제?"하고 그는 말했다.
"나머지 문제야 모두 네게 관한 거지. 멋대로 한탄하려무나! 
편지 속의 단 한 줄, 단 한 마디에도 너의 마음이 울렁대지 않는 게 있어? 
편지의 사연 하나하나가 너를 향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
펠리씨 아주머니는 이 편지를 네게 전해 줌으로써 
결국은 원 수신인에게 돌아오게 한 것 뿐이야. 
알리싸가 마치 최악의 경우에 다다른 것처럼 
그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부쳤던 것은 모두가 네 탓이야. 
도대체 네 이모에게 꼬르네이뉴의 시구가 무슨 아랑곳이람. 
말이 났으니 말이지, 실은 알리싸는 라신느의 시를 빌어서 너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알리싸는 이 모든 것을 바로 너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 두 주일 내에 이만큼 길고 자연스럽고 마음에 드는 편지를 
알리싸가 네게 쓰도록 하지 못한다면 넌 바보야...."
"그녀는 도무지 그러질 않는걸!"
"그건 네게 달려 있는 문제야.
 내 견해를 좀 들어볼 테야? 이제부터 당분간은 
너희들 사이의 사랑이나 결혼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말아. 
동생의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알리싸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일이라는 걸 너는 모르겠니! 
남매간의 정이라면 면에서 공작을 해봐. 
그리고 기왕 네가 그 바보 녀석을 돌봐 줄 참을성이 있는 바에야 
알리싸에게는 꾸준히 로베르 이야기만 써보내. 
계속해서 알리싸의 머리만 즐겁게 해줘. 
그렇게 되면 나머지 일은 잘 될 거야. 아아! 편지를 써야 될 게 나라면..."
"너는 그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어!"
그러면서도 나는 아벨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자 과연 알리싸의 편지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줄리에뜨의 행복까지는 안되더라도, 
그녀의 처지가 결정되기 전에는 알리싸로부터 진정한 기쁨이나 
온갖 것을 거리낌없이 내게 맡겨 버릴 마음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알리싸가 보내 주는 그 동생의 소식은 차츰 좋아졌다. 
줄리에뜨의 결혼은 7월에 거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날에는 아벨과 나는 학업 때문에 못 올 줄로 생각한다고 알리싸는 써 보냈다. 
나는 우리가 식에 참석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으로 그녀가 판단하고있다는 걸 짐작했다. 
그래서 시험을 핑계삼아 우리는 축하의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결혼식이 있는 지 약 두 주일 후에 다음과 같은 알리싸의 편지를 받았다.
그리운 제로옴
어제 우연히 네가 준 아름다운 라신느의 시집을 펴보다가 
벌써 근 1년간이나 내 성경에 간직하고 있는 네 조그마한 크리스마스카드 위에 적힌 
몇 줄의 시구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오늘의 사바 세계로부터 나를 주께로 인도해 올리는 것은
어떤 불가항력의 매력인가?
인간의 무리 위에 주추를 세우는 자는 불행하리라.
나는 그것이 꼬르네이유의 주석시에서 발췌된 것인 줄 알았지만 
솔직히 거기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어. 
헌데 아주 정신적인 그 제4곡을 읽어 나가다가 
네게 전해 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구절을 찾아냈어. 
그 책 여백에 네가 마구 적어 놓은 첫 글자들로 미루어 너는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녀에게 알려 주고 싶은 좋은 구절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 책이나 그녀의 책에 그녀 이름의  글자를 써넣은 버릇이 있었다) 상관 없어.
내가 그것은 즐거워서 일부러 옮겨 쓰는 거니까. 
나는 내가 찾아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네가 가르쳐 준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소 약이 오르긴 했지만 너도 나처럼 이것을 좋아했구나 하는 
즐거움 앞에서 이 어리석은 생각은 사라져 버렸어. 
그것을 여기서 다시 옮겨 쓰고 있노라니 너와 함께 그것을 읽는 것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