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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2

Joyfule 2010. 2. 12. 08:25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   

"어쨌든 흰색도 상복 차림이긴 하잖아요?"
"아니, 그럼 그 어깨에 걸치고 있는 빨간 쇼올도 
'상복 차림'이라 하겠어요? 플로라, 
내 화를 그만 돋궈요."하고 어머니는 소리쳤다. 
내가 외숙모를 본 것은 방학 동안 뿐이었으니까 늘 낯익은, 
가볍고 폭이 넓은 그 웃옷차림도 여름의 더위 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던 쇼올의 타는 듯한 빛깔보다도 
어깨를 그처럼 드러낸 모습이 더욱 어머니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뤼씰르 뷔꼴랭은 퍽 아름다웠다. 
내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외숙모의 초상은 
그 당시 외숙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딸과는 자매 지간으로 보일이 만큼 앳된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맵시로 턱을 왼손에 괸 채 새끼손가락을 맵시 있게 입술가로 굽히고 있다. 
올이 긁은 헤어네트가, 목덜미 위에 웨이브를 한, 반 쯤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도 있다. 
웃옷 깃 사이의 움푹 파인 곳엔 
검은 빌로오도의 헐거운 목걸이에 매듭이 흔들거리는 검은 빌로오도의 허리띠, 
모자끈으로 의자 뒤에 달아매 놓던 차양이 넓고 부드러운 밀짚 모자, 
이 모든 것이 외숙모의 모습을 더욱 앳되게 만들고 있다. 
오른 손은 아래로 늘어뜨린 채 덮여진 한 권의 책을 들고 있다.
뤼씰르 뷔꼴랭은 식민지 출신이었다. 
양친을 몰랐다든가 아니면 일찍 여의었다든가 했다. 
그 후 어머니가 들려 준 이야기로는, 
내버려졌거나 아니면 고아였던 외숙모는 아직 어린애가 없던 보띠에 목사 부처가 거두어서,
곧 마르띠니끄를 떠나게 되자 당시 뷔꼴랭네가 살고 있던 르아브르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보띠에 댁과 뷔꼴랭 댁은 서로 친해지게 되었다.
삼촌은 당시 외국의 어떤 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린 뤼씰르를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 집에 돌아왔을 때었다. 
삼촌은 홀딱 만해서 곧 청혼을 했는데 그로 인해 양친과 어머니는 어지간히 속은 썩였다. 
당시 뤼씰르는 16세였다. 그간에 보띠에 부인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부인은 날이 갈수록 성격이 점점 비뚤어져가는 수양딸이 
두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게다가 살림살이도 옹색했고... 
이것은 모두 보띠에 부인이 어째서 자기 동생의 청혼을 
반갑게 수락했던가 하는 것을 어머니가 내게 설명해 준 이야기다.
더 나아가서 내가 상상하기로는 사춘기에 이른 뤼씰르가 
그들을 몹시 당황케 했으리라는 것이다. 
르아브르의 사회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처럼 매혹적인 용모를 지녔던 이 아이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으리라 하는 점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성격이 온유하고 신중하면서도 순박하여 
속임수엔 감당을 못하고 악 앞에서는 완전히 당황해 버리는 보띠에 목사, 
이 어진 목사는 정말 진퇴양난에 빠졌을 것이다. 
보띠에 부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부인은 넷째 아들, 나와 같은 또래로 
후에 내 친구가 된 아들을 낳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뤼씰르 뷔꼴랭은 우리 생활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에나 겨우 자기 방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소파나 혹은 해먹 위에 저녁까지 길게 누워 있다가 지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윤기라곤 전혀 없는 이마에 땀이라도 닦으려는 듯 때때로 손수건을 갖다대곤 했다. 
정묘한 모양에 꽃향기보다는 과일내가 풍기는 이 손수건은 내게 지극히 신기한 것이었다. 
때로 그녀는 허리띠에서 여러 가지 물건과 함께 
시계줄에 달린 매끄러운 은으로 만든 뚜껑이 있는 조그만한 거울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기 얼굴을 거기에 비춰보면서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대어 침을 조금 묻혀다가 눈꼬리를 축이곤 했다. 
흔히 그녀는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는데 늘 덮여진 채 
책 중간 쯤엔 별갑으로 만든 페이퍼나이프 겸용의 서표가 끼워져 있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여전히 공상에 잠긴 채 누군가에게 시선을 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 힘없이 나른해진 손에서, 소파의 팔걸이에서, 
혹은 치마폭의 주름 사이에서, 손수건이나, 책, 혹은 무슨 꽃이나 서표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책을 주워--이건 어릴 때 추억이다--
그것이 시집인 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붉힌 적이 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뤼씰르 뷔꼴랭은 우리 가족 테이블로 가까이 오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쇼팽의 느린 마주르카를 치곤 했다. 
때로 박자가 틀리면 어느 한 음만을 누른 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외숙모 곁에서 나는 언제나 까닭 모를 어색한 기분, 
일종의 감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러한 느낌을 가졌었다. 
무의식적인 어떤 본능이 외숙모를 경계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외숙모가 플로라 아슈뷔르똥과 어머니를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미스 아슈뷔르똥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뤼씰르 뷔꼴랭 외숙모님, 나는 이제 당신을 탓하고 싶지도 않으며 
또 외숙모가 많은 잘못을 저지른 사실도 잊고 싶은 심정입니다... 
적어도 노여움 없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 하렵니다.
그해 여름의 어느 날--혹은 그 이듬해였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비슷한 배경 속에서 내 기억은 가끔 뒤섞인다--
책을 한 권 찾으러 응접실로 들어갔다. 외숙모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곧 되돌아 나오려고 했다. 
여느 때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하던 외숙모가 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