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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앙드레 지드.23

Joyfule 2010. 3. 10. 09:51
 
좁은 문 - 앙드레 지드.23   

님므의 소식은 너무나 좋아서 이제는 
나도 즐거움에 몸을 맡겨도 좋다고 하느님이 허락해 주신 것 같아. 
올 여름의 단 한 가지 근심거리는 아버지 일이야. 
내가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지만 아버지께선 늘 쓸쓸한 표정이야. 
아니, 내가 곁에서 떠나 혼자 계시게 되면 
당장에 쓸쓸해 하시고 마음을 돌려 드리기가 점점 더 힘들어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든 즐거운 속삭임도 
아버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됐어.
이제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시지 않아. 미스 아슈뷔르똥은 안녕하셔. 
네 편지를 늘 두 분께 읽어 드리고 있어. 
너의 편지가 올 때마다 사흘간을 그 이야기로 보내. 그러다 보면 또 다음 편지가 오고,
...로베르는 그저께 이곳을 떠났어. 
나머지 방학을 R이라는 친구 집에서 보낼 생각인데 
그 아버지가 모범 농장을 경영한 대. 확실히 이곳 생활은 그 아이에게도 유쾌하지 못해. 
그 애가 떠나겠다고 말했을 때 나도 그의 계획에 찬성하는 수밖에 없었어.
...할 말은 태산 같애. 끝없이 이야기하고 싶어! 
때로는 말이나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 
오늘 저녁은 꿈꾸듯이 쓰고 있어. 
어떤 무한한 부를 주고받고 있는 듯한 숨막히는 느낌만을 품은 채 말이야.
어떻게 우리는 그처럼 긴 몇 달을 서로 침묵하고 지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동면을 했던 모양이지? 
오! 그 무서운 침묵의 겨울이 영원히 끝나기를! 
너를 다시 찾고부터는 생활도 생각도 우리의 영혼도 모두가 
내게는 한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풍요해 보여.
9월 12일
피사에서 한 편지는 잘 받았어. 여기도 아주 찬란한 날씨야. 
노르망디가 그처럼 아름다운 것도 처음인 것 같애.
그제는 목표도 없이 아무 데나 발길 닿는 대로 한참동안 벌판을 거닐었지. 
태양과 기쁨에 함빡 취했음인지 돌아왔을 때도 피곤하기보다는 흥분한 상태였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짚더미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구태여 내가 이탈리아에 있다고 생각지 않아도 온갖 것이 아름다워 보였어.
그래, 네가 말하듯이 대자연의
 '은은한 찬가' 속에서 내가 듣고 깨달은 것은 환희에로의 권유야. 
그 권유는 새들의 노래마다 들려 왔어. 
그것을 송이송이 꽃향기 속에서도 맡았어. 
지금 나는 유일한 기도의 형식으로 예찬이란 것밖에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고,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주여! 주여! 하며 
그것만을 형언할 수없이 사랑에 가득 찬 마음으로 되풀이하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식장이가 되어간다고 걱정하진 마. 요즈음 책을 많이 읽었어. 
며칠간 비가 온 덕택으로 나는 예찬을 마치 책 속에 접어 넣은 것 같애.
말브랑슈를 읽고 나서 곧 라이프니쯔의 '클라르크에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어. 
그리고 좀 휴식할 생각으로 셸리의 '첸치'를 별다른 감흥도 없이 그냥 읽었어. 
'라 쌍시띠브'도 읽고. 혹 네가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지난 여름 함께 읽었던 키이츠의 오드 네 편과 바꾼다면 
셸리와 바이런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애. 
마찬가지로 보들레르의 소네트 몇 편과 위고 전부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애. 
위대한 시인이란 칭호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시인이라고 생각해. 
아, 모든 걸 내가 알고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해준 데 대해 네게 감사해.
...아니, 서로 만나는 며칠 동안의 즐거움 때문에 여행을 단축시키지는 말아. 
아직은 만나지 않는 편이 정말 좋을 것 같애. 나를 믿어 줘. 
네가 내 곁에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으로 너를 생각할 순 없을 거야. 
너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 않게 되었어.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늘 저녁에 온다는 걸 알면 나는 달아나 버릴 거야.
이 마지막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안돼서,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징집되어 낭시로 이송되었다.
그 곳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나 나는 혼자 있게 된 것이 기뻤다. 
그것은, 그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내 긍지로서나 
또 알리싸에게 있어서나 이렇듯 그녀의 편지만이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며 
또 그녀에 대한 추억만이 롱사르의 말처럼 
'나의 유일한 마음'이라는 사실임을 고적함으로써 한층 뚜렷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우리에게 과해진 엄격한 군 규율도 쉽게 견디어 냈다. 
나는 모든 일에 마음을 단단히 가졌다. 
알리싸에게 쓰는 편지에도 함께 있지 못함을 섭섭하게 여긴다는 말밖에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렇게 오래 헤어져 있는 중에도 
우리들의 용기에 어울리는 시련을 찾아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결코 불행하지 않는 너',
 혹은 '낙담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너'라고 알리싸는 써보냈다. 
이러한 그녀의 말에 증거를 보이기 위해 무엇인들 내가 견디지 못하였으랴?
우리가 헤어진 지 거의 1년이 지났다. 
그녀는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는 것 같았고, 
단지 이제부터 기다리기 시작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것을 비난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나는 함께 있었지 않아? 
나는 하루도 네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것도 모르다니! 
지금 잠시 너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줘! 
그리고 이것이, 단지 이것만이 내가 '떨어져 있다'고 부르는 거야.
정말이지 나는 군인이 된 너를 상상해 보려고 애써. 
하지만 도무지 그렇게 안 돼. 
그저 저녁이면 베따 거리의 조그마한 방에서 
글을 쓰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는 너를 상상해 볼 따름이야. 
한데 그것마저도 까마득해. 1년 후 퐁궤즈마르나 르아브르에서 너를 다시 볼 것 같애.
1년! 이미 가버린 날들을 세는 건 아냐. 
나의 희망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그 날을 주시하고 있어.
 정원 안쪽의 낮은 흙담, 그 밑에 국화가 바람을 피해 피어 있고, 
그 위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가 돌아다니던 그 낮은 흙담이 생각나? 
줄리에뜨와 너는 곧장 천국으로 걸어가는 회교도처럼 겁도 없이 걸어다녔지? 
그런데 난 몇 걸음 내딛기만 하면 현기증이 났고 그때마다 네가 밑에서 소리쳤지.
"발밑을 보지 말래도! 앞을 봐! 그대로 걸어! 목표를 정하고!"
마침내--소리치는 것보다 그편이 더 좋았어
--넌 담 저쪽 끝에 올라와서 나를 기다려 주었지. 
그러면 난 떨리지가 않았어. 현기증도 사라져 버리고! 
단지 너만을 바라보고 너의 벌린 팔 속으로 달려들곤 했지....
너를 믿는 마음이 없다면 제로옴, 나는 어떻게될까? 
네가 강하다는 것을 나는 늘 느껴야 돼. 약해지지 말아.